NG 하지 마

 

언제 NG 할 지 알아

 

좋아

 

자, 가

 

70년대에 타이완은
10대 건설계획을 추진해

경제 발전을 이뤘습니다

 

70년대는 타이완의
국제적 위상이

 

실추한 년대이기도 했습니다

미국에 의해
유엔에서 밀려났고

각국과 외교가 단절됐습니다

타이완은 고립됐습니다

경제 발전의 결과로

중산층이 점점 더
독자적인 힘을 얻어

권력의 분배를 요구했습니다

 

타이완의 역사가
조금씩 드러났고

 

새로운 역사 인식이
차츰 이뤄졌습니다

 

린화이민/안무가
이 시기에

 

정치 경제 문화가
하나로 뒤섞였습니다

 

문학에서는
70년대 향토 문학이 출현해

섬의 이야기들을
문자로 서술했고

 

'운문단'은 춤으로 말했습니다

 

리샹줘의 민가 운동과
잡지 '미려도'가

 

그때 나타났습니다

80년대에 정치적인
미려도 사건 이후에

널리 알려졌으며

아주 직설적이고 예술적인

소극장 운동이었습니다

 

누구나 할 말이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신영화(New Cinema)'가 출현해

대규모의 표현을 했고

 

몹시 강렬했습니다

 

"펑꾸이에서 온 소년"에서

 

바닷가 파도 속에서
춤추던 인물들이

 

대도시로 이주합니다

 

"비정성시"에서는

시대의 변천과

희생된 인물들을 봅니다

 

"해변의 그날"은

 

과거에 탐닉하는
사회 엘리트 집안이

불확실한 새 시대에서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는

고민하는 청소년들이

청춘의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억압된 감정의 충돌이
80년대의 주제라 생각합니다

 

1987년에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양안 관계가 자유로워졌습니다

 

80년대의 기반은
70년대였고

 

큰 일들이 이뤄졌습니다

 

그것이 지금 타이완의 자유로운
개방 사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연극, 영화, 예술과 문학이

중요한 역활을 했습니다

 

됐습니까?

 

감사합니다

 

광음적 고사, 타이완 신영화
타이페이의 꽃, 타이완 뉴시네마

 

태국, 치앙마이

 

병원 복도에서

 

간호사가 달립니다

 

병원 복도에서

 

불이 깜빡입니다

 

모기장

 

열차 안에

 

말을 못 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어린 여학생이
연인에게 찔립니다

 

20년 전 시카고 대학에서
영화 공부를 하며

 

많은 다양한 영화들을
봤는데

 

미국 실험영화가 와닿았습니다

 

필름 센터에서
많은 아시아 영화들을 보여줬고

 

이란과 타이완
영화들이었습니다

이 영화들을 보면서

그 참신함에 놀랐습니다

 

낯선 다른 형태의 영화였고

 

내가 찾던 영화였습니다

그 자체로
실험적이지는 않았지만

내가 자라온 것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들

 

그래서 태국으로 돌아가
영화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아피차퐁 위라세타쿤/감독
그 작품들이 집 -

 

그러니까 고향을 상기시켰고

 

어린 시절의 경험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영화들이 기억을
다룬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일으키는 불꽃들은

 

소중한 가치입니다

영화는 기억입니다

 

타이완 뉴시네마가 지속적으로
작품에 영향을 줬습니다

 

종종 찍은 뒤에 생각합니다

왜 이 프레임이지?

그러다가 타이완 뉴시네마를
떠올립니다

 

그 평평한 평면구도나

 

창문과 문을 사용하는 프레임

 

프레임 속에
프레임이 있는 구도

 

대개 기울지 않고
똑바르고 평평합니다

단순하고 소박합니다

분명히 거기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다른 영향은
시간에 관한 건데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관찰하는 듯합니다

 

허우샤오시엔과 양덕창

 

차밍량의 영화를 보면서

 

늘 잠이 들곤 했습니다

 

몇 년 뒤에
내 작품을 본 관객들이

잠이 든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 영화들에 특별한 힘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관객들에게
자신을 남겨놓은 채

다른 세계로 데려가

휴식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는 우리를
꿈의 세계로 이동시키고

 

깬 채 거기 있으면서

아주 독특한 여행을 합니다

 

빠리

 

피에르 뤼시앵
전 칸 영화제 자문위원

 

처음 "펑꾸이에서 온 소년"을
본 걸

똑똑히 기억해요

 

"펑꾸이 에서 온 소년" 1983
허샤오시엔

 

아주 놀랐어요

 

뛰어난 재능과 신선함이 있었어요

그 신선함 때문에

 

쉽게 이 영화에 빠져들었어요

 

영화의 기원이랄 수 있는

 

무성영화 시대로 데려다줬어요

 

"샌드위치맨"과 "우리 시대"

이 영화들은 성공했어요

뒤이은 "동동의 여름방학"과
"동년왕사"

에드워드 양의 "공포분자"와
"타이페이 이야기"로

세계가 타이완의 문화를
인식했어요

 

"공포분자" 1986
양덕창

 

30년이 지났는데도

그때 느꼈던 신선함이 여전해요

 

기원으로 되돌아가는 그 감각은

 

아마 의식적으로

 

기원을 명확히 한 게 아니라

 

은연중에 드러내서였을 거고

 

1983년 무렵의 그게 경이로웠어요

 

타이완 뉴시네마가
어디서 시작했는지

말하기 어려워요

 

더 큰 영화적 범주에서 비롯된

동아시아 영화 문화의
발현 과정 중의 일부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며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봐요

 

토니 레인즈/영화 평론가
처음 타이완 뉴시네마를 접한 건

 

에드워드 양을 통해서였고

 

런던영화제에 "우리 시대"를
들고왔던 1983년이었어요

 

당시 영화제 일을 했고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친구가 됐는데

근래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작품을 만든 지 2년 뒤에

런던영화제에 출품했고

 

타이완에서는
처음인 걸로 알고 있어요

 

제작사의 지원이 별로 없어
고군분투했고

 

다른 영화들의 자투리 필름으로
만들었다고 했어요

 

양덕창(1947 - 2007)

 

당시에 열정이 대단했어요

 

허우샤오시엔의
"펑꾸이에서 온 소년"에

고전음악을 추천했고

 

아주 가깝게 지내며
서로를 지원했어요

 

당시의 주요인물들로는

 

물론 에드워드 양과
허우샤오시엔

 

나중에 감독으로 활동한
우니엔젠

 

또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커이정이 있었어요

 

커이정은 다른 인물들과는
좀 달랐어요

형식주의적 실험에
보다 관심이 있었고

덜 정치적이었고

 

남들보다 활동에
덜 참여했어요

 

"개구리의 뜀" 1982
커이정

 

머리 가볍게 풀고

 

얼굴에 분 살짝 바르고

 

붉은 노을과
푸른 안개 속에서

하늘거리는
버드나무처럼 걷네

 

헤어질 테니
안 만나느니 못 하구나

 

무정한 것이 정이런가

 

문학을 해야 했어

가슴 속에
이런 열정이 있는데

눈이 마음을 전하고

말이 입에 맴도네

사랑해

 

빠리, 프랑스 시네마테크

 

마르코 뮬러/프로듀서
마리 삐에르 뒤아멜/영화제 큐레이터

 

마르꼬, 1978년에 중국에서 돌아와
바로...

 

네, 바로 홍콩으로 갔어요

당시 홍콩에 있던
양덕창과 자주 만났어요

 

1981년에 첫 장편을 만들었는데

두 편의 공동창작 작품을
준비 중이라고 했어요

 

"아들의 큰 인형" 1983
허우샤오시엔

 

이 공동작품들에서

형성되고 전개됐던
어떤 흐름을 볼 수 있어요

 

가장 중요했던 건
새로운 제작 방식이었어요

 

오랫 동안
거대한 반관영 기구였던

 

중앙전영(CMPC)의
통제를 받고 있긴 했어도

 

그에 비해

 

놀랍도록 창작의 분위기는
자유로웠어요

 

타이완 뉴시네마와

 

홍콩 뉴웨이브가
출현한 뒤로

지속적으로 눈여겨봤는데

타이완 뉴시네마에
중점을 두기로 했어요

1984년에 뻬자로에서
첫 회고전을 열었는데...

 

발표되지 않은
주요 문건들과 평론들이

포함돼 있었어요

 

우니엔젠, 허우샤오시엔
양덕창, 첸구오푸, 잔홍즈

 

빠리, 뛸르리 공원

 

타이완 영화의 발전 과정을
지켜본 걸로 아는데...

 

처음엔 타이완 영화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당시엔 다들 중국어 영화에
익숙하지 않았어요

그 과거와 현재의 역사에

 

1981년 마르꼬 뮬러가
토론토 영화제에서

중국 영화 회고전을
기획했는데

 

타이완 영화는 정치적 이유로
상영되지 못 했어요

 

당시만 해도 중국 영화를 보는 게
대단한 일이었는데

중국과 대만 영화를
같이 상영할 수 없었어요

 

올리비에 아샤야스/감독
장 미셸 프로동/평론가

 

모든 게 몹시 모호하고
불확실했어요

자료와 소식들이
단편적이고 불완전했고

 

영화들의 배경을
알 수 없었어요

샤를 떼송과 함께
중국어 영화에 입문하는

어떤 틀을 짜보기 위해

그 영화의 역사와 판도를
배우기로 했어요

 

1984년 홍콩에서
연구를 시작했는데

 

그때 새로운 중국어 영화 물결이
홍콩에 일었고

놀랍게도 거의 동시에

 

새로운 영화들이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배경으로
출현했어요

 

홍콩처럼 상업적인
스튜디오 시스템이 없었고

 

중국의 영화 제도는
아주 묘했는데 비해

타이완 영화계는
사막이나 다름없었어요

 

아니, 아니에요!

타이완 영화계가 사막 같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반대로 영화 문화가
아주 다양했어요

젊은 층은 아니라도
고정 관객층이 있었어요

젊은 층에 집중한
홍콩의 장르영화나

할리우드의 상업영화들과 달리

타이완 영화는
역사적 가치를 유지했어요

문학적인 경향을 띤

 

주로 성인 관객층 대상의
멜로드라마 장르였어요

 

"외로운 17살" 1967
배징뤼

 

다메이, 무슨 할 말 있어?

 

아니, 없어요, 오빠

 

소망이 행복을
가져온다고 믿어요?

 

그럴 때도 있지
왜 물어?

 

영원히 행복하길 바랄게요

 

고마워

 

타이완에서는
달리 전개된 게 사실이지만

우니엔젠처럼 새로운 생각의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타이완 뉴시네마가
자양분을 취해서예요

타이완의 일단의
영화감독 세대들이

자국의 역사와 만났어요

 

"사과의 맛" 1983
완렌

 

여보세요, 미국 대사관의
수석 서기관입니다

 

그 흐름을 파악하지 못 했어요

 

처음엔 그게

일치된 행동인 줄 몰랐어요

 

아주 초창기를 제외하고는

 

공동 목표가 있다는 걸
보지 못 했어요

분산된 첫 그룹에게는

정말 달리 나가려는
욕구가 있었어요

 

다른 유형의 영화를
다른 방식

 

다른 스타일로

 

보다 세련되게
만들려 했어요

 

또한 보다 국제적으로

그러니까 세계 무대에서

국제적인 수준에 맞도록

 

동시에

 

전후에 타이완에서
벌어진 일들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묘사했고

 

그게 특별한 관심을 끌었어요

 

"비정성시" 1989
허우샤오시엔

 

아수에, 사숙이 잡혀갔어

 

지금 어디 있는지 몰라

 

몸을 피하고 싶지만

 

어디로 가겠어?

 

"1947년 2월 28일, 타이완 정부는
자국민 만명 이상을 학살했다"

 

베니스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본과 중화권 쪽을 맡았어요

 

때가 됐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타이완 영화 "비정성시"를
밀어주기로 했어요

중국의 노감독 셰진이

심사위원들을 설득했고

 

심사위원이었던
이탈리아의 푸피 아바티 감독은

중요한 상을 주는 것이

중화권 영화에
역사적인 일이 될 뿐더러

세계 영화사에 새 장을
열거라고 했어요

 

이 일로 타이완의 존재가
다시 부각됐어요

 

대회장에
타이완 국기가 걸린 건

 

당시로서는
큰 외교적 사건이었고

중국의 공식 항의를 받고
내려야 했어요

 

나는 맞은 편의
엑셀시오라 호텔에 묵었는데

 

국기를 든 타이완 대표단을
맞이했고

국가적 위신을 잃지 않고

기자회견을 할 수 있었어요

 

상을 받았어도
더 할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 압도되면 안 됩니다

 

상은 생각 않고

 

정말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할 겁니다

 

사실

 

타이완 뉴 시네마는

 

서구에서 주목받지 못 했고
흥행에 성공하지 못 했어요

 

영화제 밖에서는
관심을 끌지 못 했어요

 

전체적으로 영화를

 

서구의 관객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눈으로 접하는
타이완의 생활과

타이완의 현대사가

일반 관객들에게는
너무 추상적이었어요

일반 관객들은 1950년대의
백색 테러를 알 수 없었고

 

타이완 원주민과
본토 이주민이란 걸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 사회적 배경과
심리적인 영향을

 

알 수 없었어요

그럼에도 훌륭한 감독인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은

 

뛰어난 예술적 기량을
발휘했어요

주제의 의미가
절실하게 와닿지 않더라도

솔직하고 진지한 접근과

혁신적인 미학

그 수많은 참신한 생각들

 

영화언어와 영상의 구도

 

미장센
특히 롱데이크 미장센

 

이런 새롭고
독창적인 시도들이

장소에 관계없이
공감을 줬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라르도 나우만/감독
집에서 뭘 찾았나 봐요

 

루고네스 극장 팸플릿

 

타이완 뉴시네마 프로그램?

자스민 로페스/감독
아직도 깨끗하네

 

13년 됐는데

벽장에 뒀어요

내 영화 각본과
카탈로그들과 같이

 

허우샤오시엔과 함께 컸달까

80년대 이후
작품을 쫓아다녔어

 

아르헨티나에서요?
BAFICI 영화제 이전에?

아니, 여기가 아냐

 

80년대엔 뉴욕에 살았고

거기서 봤어

극장이 아니라

차이나타운에서 열린
작은 아시아 영화제에서였어

 

처음 허우샤오시엔 영화를 보고

그 자리에서 반했어

 

그래서 타이완 영화를
가까이 하게 됐고

거기 사로잡혔어

 

타이완과 타이완 감독들이
어떤 인상을 줬어요?

한 국가의 인상이라기보다는

 

어떤 영화에 관한 거야

당대의 타이완 영화가

친밀감을 주는 것 뿐이야

60년대의 누벨바그처럼

 

근데 내가
누벨바그 세대가 아니라

 

타이완 뉴시네마가
더 가깝게 느껴져

특정 감독 말고도
여러 감독들이

 

내가 말하는
타이완 뉴시네마는

1982년에서 86년까지의
작품들일 뿐이야

몇 편 안 되고

그 뒤로 그 감독들은
다양하게 발전했어

 

통틀어 뉴시네마의
일원으로 알았는데...

영화제 때문이었나?

 

같은 시대를 산 것도 아니고

감상하면서 안 건
좀 복잡하고

 

좀 느린 영화라는 거예요

 

"연연풍진" 1986
허우샤오시엔

 

왜 그래?

 

수학 시험을 잘 못봤어

 

도와달라고 하지

 

도꾜

 

저는 이찌야마 쇼조입니다

 

영화 프로듀서고

 

허우샤오시엔 감독과
"호남호녀"

"남국재견", "해상화"를
같이 작업했습니다

 

다음엔 지아장커 감독과
작품을 함께 했습니다

 

도꾜 영화제에서
"희몽인생"이 상영된 뒤에

허우샤오시엔 감독과
안다는 분이

연락을 했습니다

 

어떤 작품을 준비 중이었는데

투자자가 갑자기 손을 떼

곤란하다면서

일본 회사가
투자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다른 타이완 감독들도

허우샤오시엔 감독처럼
그런 스타일인지 몰랐습니다

일본에서 영화를 제작할 땐

그런 자유로운 방식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임의적이라고 할까

그런 스타일입니다

 

허우샤오시엔 감독과
10년 전에 함께 작업했고

 

아사노 다다노부/배우
이 중고 서점에서

"카페 뤼미에르"를 찍었습니다

 

고맙게도 감독의 스타일이

배우 위주로
진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어떨 땐 한 장면을 마치고

 

이튿날 같은 장면을
또 찍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재촬영(retake)'이라 해서

 

중대한 문제가 없으면
하지 않았습니다

 

근데 며칠에 걸쳐
같은 장면을 찍었습니다

 

하루는 왜 계속 다시 찍느냐
물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오늘은 더 생기있게 보여서"

그때서야 가장 기본적인 걸
알았습니다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건
배우 상태를 포착하는 것이구나

 

사람 뿐 아니라
날씨와

공기의 흐름

 

현장의 분위기

이런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촬영 전에 뵈러갔는데

놀라고 말았습니다

 

영화사에서
고급 호텔을 예약해줬는데

 

그걸 취소하고

신오꾸보 역 근처의
중급 호텔에 드신 겁니다

 

거기서 만나뵜습니다

 

만나보니

 

뭐랄까
영화감독처럼 보이지 않고

 

친근한 아저씨 같았습니다

 

바로 같이 일하는 게
즐거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가 신오꾸보 역 앞의
고류가꾸 호텔이고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도꾜에서 묵던 곳입니다

모임이 끝나고 이 호텔로
자주 데려다주곤 했습니다

 

친근한 느낌이 드는
추억이 서린 곳입니다

 

"밀레니엄 맘보"의
마지막 장면을

주연인 슈지 상과 함께
여기서 찍었습니다

 

"밀레니엄 맘보" 2001
허우샤오시엔

 

영화 일을 한 지
30년 됐습니다

 

요점은 그게 아니고

타이완 뉴시네마가 30주년인데

 

제 30주년이기도 합니다

 

인연이라고 할까요

 

기묘한 일이고

그 이야기를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구로사와 기요시/감독

 

에드워드 양의 영화들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맨처음에 본 게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었고

 

깊은 인상을 줬습니다

다음에 본 게 "마작"

"독립시대"
"하나, 그리고 둘"이었고

모든 작품들이 제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독립시대" 1994
양덕창

 

왜 그래요?

 

샤오펑, 슬퍼 말아요

 

콘택트 렌즈가 빠졌어요

 

그럼 안 보여요?

 

괜찮아요

 

왜 안 놀고 나왔어요?

 

내일 출근해야죠
안 그래요?

 

미안해요
그런 뜻이 아니라...

 

내일 치치와
샤오뽀한테 간다면서요?

 

푹 쉬어요

 

"이건 배우들이 좋아하는 화제다"
...샤오뽀 알아요?

 

치치와 샤오뽀와
다 동창이죠

 

말리와도 동창이겠네요

 

그래요

 

택시 잡아줄게요
안 보이니까

 

연기 공부 했다면서요?

 

근처에 살아요
좀 걸어요

 

당시의 타이완 영화들이
타이완의 모습을

다듬어지지 않게
묘사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련된 영화언어였습니다

 

세트도 짓지 않고

 

실재 인물들과
실재의 장소를 사용했습니다

 

현실적인 소재로

 

추구하는 영화적인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사실적인 인물과 배경을
이용하면서

또한 개인적인 스타일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극적인 효과를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공포분자" 1986
양덕창

 

일본에 타이완 영화가
잘 알려져 있지만

 

사또 다다오/평론가
주요 감독들 중에

일본에 소개되지 않은
감독도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왕퉁 감독이고

애석한 일입니다

왕퉁 감독의 작품들을
아주 좋아하고

모든 영화들이 훌륭합니다

 

특히 "바나나 천국"을
좋아합니다

 

국민당 정권이 내전에서 져서

타이완으로 후퇴합니다

 

거기서 본성인과 외성인 사이에
여러가지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후 타이완에 새롭고
독특한 사회가 형성되는데

 

이 모순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된
타이완의 보통사람들은

자신들의 슬픔과 쓰라림을
희극적으로 표출합니다

 

실례되는 말일지 몰라도

 

그게 가슴에
깊게 와닿았습니다

 

"바나나 천국" 1989
왕퉁

 

그만, 그만, 그만해

 

왜 그래?

무슨 노랜지 모르겠어

 

내가 한 곡 할게

 

자, 부른다

 

어깨에 총 메고

 

어깨에 총 메고
가슴에 수류탄 걸고

 

당당하게 나간다!

 

다른 노래

 

"내 고향"(만다린어)

 

"보고파라"(타이완어)

"내 고향"

"보고파라"

 

정든 고향아
이제 나는 전선으로 간다

조국을 지키고

일본 침략자들에게 맞서

처자를 지키기 위해...

 

타이완 사회 특유의
어떤 애절함 같은 게 있습니다

 

타이완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기 전에

 

뭐랄까

 

중국과 일본의 양대 문화가
스며들고

다른 문화들이 더해지면서

타이완만의 독특한
성격이 이뤄지게 됐습니다

 

고레헤다 히로까즈/감독

 

아버지가 타이완의
가오슝에서 태어나셨어요

 

거기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니셨고

 

자이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셨어요

 

타이완 남부에서 성장하셨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 뤼순에서 일하셨어요

그러다 군에 입대했고

 

시베리아로 보내졌어요

 

전쟁이 끝나고 3년 뒤에

처음 일본 땅을 밟으셨어요

 

파란만장한
청춘기를 보냈지만

 

타이완에서의 생활이
아주 즐거웠다고 하셨어요

인생의 작은 일부였지만

 

아무 근심 걱정 없이
행복했던 시절이라셨어요

 

늘 바나나가 얼마나 맛 있었고

 

파인애플이 얼마나 맛 있었는지

 

거듭 이야기 하셨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기분이 좋으실 때면

파인애플을 집에 사와

 

이렇게 잘라 나눠주셨어요

 

가족들이 맛있게 먹고 있으면

"타이완 게 훨씬 맛 있었어"
중얼거리셨어요

 

"동년왕사" 1985
허우샤오시엔

 

나중에 "동년왕사"를
여러 번 보면서

내 어린 시절과 연결되는

 

어떤 말없는 친밀감을 느꼈고

 

위화감 같은 게 없었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자라면서

 

일본과 타이완의 관계를
생각하게 됐고

아버지의 행복했던
청춘의 기억만으로

 

그걸 덮을 수는 없었어요

 

영화는 감동적이었어요

 

이런 걸 찍고 싶다 생각했어요

 

솔직히 80년의 일본 영화들은

 

존경하는 감독들이
몇 있긴 했어도

 

따르고 싶은 방식은 없었어요

 

내게 맞는 건
그런 감각이었어요

 

여긴 지가사끼 여관이고

 

도꾜 시내에서
차로 1시간 거리예요

 

오즈 야스지로와 노다 고고
감독 작가 콤비가

이 방에서 일했어요

지금도 큰 변화는 없을 거고

 

여기서 "동경 이야기"의
각본을 썼어요

 

일본인이 타이완 영화를 볼 때

먼저 느끼는 건

타이완에 예전 일본 문물이
깊숙히 스며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동동의 여름방학"에서

시골의 할아버지 집에 가는데

 

할아버지가 의사고

 

그 의원 건물이
예전의 일본식입니다

 

그런 식의 건물을
외국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전형적인 예전의
일본 시골의 의원 모습입니다

 

이런 장면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그 향수가 정감 어린
추억이긴 해도

즐겁다고 할 수 없는 게

어두운 식민지 시대에

 

주민들이 몹시 고생했기 때문입니다

 

"초급대국민" 1995
완렌

 

완렌 감독의 "초급대국민"을 보며

가슴을 저미는 듯한
통렬한 아픔을 느낍니다

 

영화는 50년대 백색테러의
공포를 묘사했는데

 

그때 지식인들이
크게 박해 받았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일본어 정치 문헌들을
접했습니다

 

그런 일본어 학술 활동 때문에

 

반역자라 비난 받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인데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주인공은 속죄하기 위해

피살된 친구의 묘를 찾습니다

그때 일본어로 용서를 구합니다

 

진심을 전하는데
일본어를 쓰는 겁니다

 

그걸 보며 몹시 난감했습니다

 

타이완 영화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장면입니다

 

미안해

 

홍콩

 

예전의 홍콩 감독들은
TV에서 시작했고

아주 친했습니다

 

잘 만나긴 했어도

함께 일하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타이완 감독들은

서로 잘 도왔습니다

 

라우웨이밍/평론가
허우샤오시엔은 집을 팔아

양덕창의 "청매죽마"의
제작비를 댔습니다

 

이전에
"샤오비 이야기"에서도 그랬고

 

늘 그럽니다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내가 거기서
"아푸의 예물"을 찍을 때

양덕창도 나서서

 

장화군에게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감독들의 교분이 끈끈합니다

 

80년대는 타이완에
세상이 뒤바뀌는 10년이었습니다

 

홍콩에선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양덕창은 대륙에 가서

친지들을 만나고
그 이야기를 쓰려 했지만

국내 사정이 너무 급박해서

 

기록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각본을 쓸만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차렷!

 

가운데 줄 기준
옆으로 나란히

 

"샤오비 이야기" 1983
첸건후

 

앞에 봐!

 

쉬어

 

차렷!

 

우향우

 

바보야!

 

좌향좌

 

옌옌, 형을 봐

 

정신 좀 차려

 

또 틀렸어
멋대로 돌아

어떻게 도는지 몰라?

 

차렷!

 

쉬어

 

차렷!

 

쉬어

 

우향우!

 

옌옌

 

구령할 땐
배에 힘을 주고

우렁차게 해

 

차렷!

 

앞에 봐!

 

제게 최고의 영화란

 

그 시대의 현실을 포착하고

 

당대의 반응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런 면에서 타이완 뉴시네마는
완전히 부합합니다

 

홍콩 연기 영화 TV 아카데미

 

그런 영화들의 시대가
예전이든 또는 당대든

 

슈케이/아카데미 원장
그 시대의 정신을 생생히 기록하며

 

관점이 명확합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어떤 관심을

 

아주 명확히 드러냅니다

 

홍콩 영화도 비슷하지만

홍콩 영화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상업주의로 흐릅니다

 

소수를 제외하곤
거의 상업적입니다

 

그게 어떤
압박 때문이라는 게 아니라

생존의 자연스런
조건입니다

 

하지만 타이완에선

나중에

또한 몹시 시련을 겪었고

압박이 있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큰 용기를
발휘했습니다

그 용기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릅니다

그런 시련을 몰랐던 건

나타내지 않아서였습니다

아무튼 결단과 인내로 버텼고

 

그 점을 높이 삽니다

 

그런 게 홍콩 쪽에선
없었습니다

 

왜 내가 홍콩에 있지?

 

왜 내가 홍콩에 있을까?

 

잉량/중국 감독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으로
2012년 로카르노 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중국 학생들은 대개

 

홍콩 영화에서
거리의 총격전이나

 

식당의 흑사회 모임
같은 걸 기대해요

 

이게 홍콩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공통된 경험이기도 해요

 

아주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게

홍콩의 장르영화들이고

이게 오해를 낳아요

 

타이완은 달라요

타이완 뉴시네마는

 

처음 타이완을 찾아

지방의 가게나 호텔 같은 데서

 

일하고 사는 모습을 봤는데

 

만다린어와 타이완어를
함께 썼고

전에 여기 있었던 것처럼
친숙했어요

중국 5세대 감독들에게서는

 

그런 걸 느끼기 힘들어요

예를 들어 "국두", "황토지"

 

그런 영화들은
멀게 느껴지고

 

접근 방식이 달라요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하는 게 아니라

이런 각도에서
뭔가 모자란 게 있어요

 

"말 없는 산언덕" 1992
왕퉁

 

왕퉁이
타이완 뉴시네마 감독 중에서

제일 친근하게 느껴져요

친근하다는 건

"말 없는 산언덕"이나
"허수아비"가

시골 마을을 무대로

그 잔혹함과 불합리함을

잘 다루고 있고

 

쓰촨에서의 제 경험과
비슷해요

 

이 영화들에는

"연연풍진"과 "동년왕사"와는

또다른 향토적 정서가 있어요

 

왕퉁에게는
독특한 유머 감각과

흙 냄새 같은 게 있고

그게 허우샤오시엔과
다른 점예요

 

또 한 명의 영향을 받은
타이완 감독이

양덕창예요

 

도시 생활을 알게될수록

나 자신을 더 알게되고

 

그 영화들이
가슴에 와닿았어요

 

지금 2013년에 돌이켜보면

 

현재 중국의 도시와
인간 관계의 이면을

 

예언한 것 같았어요

 

재벌들의 책략을
이해 못 하겠어

 

소송 중인 회사들까지
사들이고

 

"청매죽마" 1985
양덕창

 

그런 짓을 잘도 해

 

이런 일이 운명이라고
차츰 믿게 될 걸

 

아무리 계산해봐야
소용 없어

 

사소한 착오가
치명적인 결과를 낳아

 

내 말 못 믿겠어?

그렇게 비관적인 건 싫어

자기 심리만 위축돼

 

저 건물들을 봐

 

점점 분간이 안 가

 

내가 설계한 게 어떤 거고
아닌 게 어떤 건지

 

다 똑같아 보여

 

내가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빠리

 

처음에 이 타이완 뉴시네마
감독들을 접하곤

다루는 주제를 알아보려 했어요

 

두 가지를 깨달았어요

 

먼저 허우샤오시엔에게서
중국 문화적인 걸 느꼈어요

 

타이완 문화 이전에

당시 중국에선
현대적인 영화랄 게 없었어요

 

1984년엔 아니더라도
85년과 86년엔

"황토지"와 "붉은 수수밭"같은
영화가 나타났어요

 

네,하지만
그 점에 동의 못 해요

 

그 영화들을 좋아하긴 해도

 

허우샤오시엔이 보여주는

 

순수하고 강렬한 현대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요

 

근데 내 말은

 

"펑꾸이에서 온 소년"이나
"해변의 하루"에서

 

서구 영화의 흔적들이 보여요

예를 들어 "동동의 여름방학"에선
로셀리니가 떠오르고

 

"해변의 하루"는
안토니오니를 생각하게 해요

 

하지만 "황토지"에선
그런 점을 찾지 못 했어요

아주 별난 영화 세계라
생각해요

어떤 게 더 낫다거나
더 현대적이라는 게 아니라

흔적의 문제로

고백하자면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의
영화에 끌린 건

 

이국적인 흔적이 없어서고

현대영화의 정신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에서
나타났던

 

그런 정신을 느껴서예요

 

내 생각에 중요한 건

 

타이완 영화를 현대 영화의
영역에 들여놓은 거예요

그래도 여전히 중국적예요

 

더 적어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91
양덕창

 

날이 밝기 전에

 

다시 오겠소

 

다 됐어요
마무리 지을 게요

 

시간 조금만 더 줘요

 

좋아, 좋아
가도 돼요, 어서

 

베이징

 

처음 본 타이완 뉴시네마가

 

지아장커/감독
"펑꾸이에서 온 소년"이었고

 

영화를 보는 1시간 반 내내

 

영화에 완전히 빠져들었어요

 

돈 내
3백위안씩 9백

 

거스름돈요

 

저리 들어가

 

빨리빨리
경찰 올지도 몰라

 

"펑꾸이에서 온 소년" 1983
허우샤오시엔

 

뭐 없잖아

 

씨발, 사기당했네!

 

씨발, 총천연색에
시네마스코프네

 

영화를 보고나서
강렬한 인상을 받은 건

 

이 영화가 나와

 

내 친구들

주위의 젊은이들을
그린 것 같아서였어요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타이완 영화가

 

그토록 진솔하게
나 자신을 반영했는지

 

이제 돌이켜 생각하면

허우샤오시엔의
"펑꾸이에서 온 소년"이

타이완의 경제 변화를
보여준 것 같아요

 

아울러
정치적 변화의 분위기까지

 

내가 영화를 공부하던 90년대에

중국이 비슷한 경제적 변화와 함께

 

정치적 변화도 겪고 있었어요

 

10년의 거리가 있긴 해도

 

그 경제적 사회적 변화는
아주 비슷했어요

 

타이완 뉴시네마는
영화의 한 흐름이면서

하나의 영화 운동으로

 

내게 큰 변화와 영감을
안겨줬어요

 

그 영화들은 현실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체험과 기억에
밀접히 연결돼 있어요

 

이런 문화적 태도와 문체는

 

문화혁명 동안 중국에서
중단된 것이었어요

 

내 생각에 이 영화들은

중국 영화의 전통과
연결돼 있어요

 

2,30년대의 중국 영화의 전통과

그 시대의 문학적 전통까지

 

"연연풍진" 1983
허우샤오시엔

 

먼저 집에 가
난 안 돌아가

 

어디 가?

 

나 혼자 어떻게 집에 가?

 

이러지 마

 

티엔좡좡/감독

 

사실 타이완 뉴시네마는
몹시 느려요

 

인내가 있어야 하고

 

보는 게 쉽지 않아요

 

당시의 감각으로

 

타이완 뉴시네마를
즐겨 봤고

어떤 흡인력이 있었어요

 

타이완 뉴시네마가
사회에 직접 개입한 게 아니라

간접적으로 했다고 봐요

 

그런 간접적 방식이

 

시대의 연결점을
느끼게 하면서도

 

시대를 뛰어넘는

다른 관점이었던 것 같아요

 

그게 아주 특별했다고 생각해요

 

이름이 뭐니?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 1985
창이

 

일을 분명히 하려고 왔어요

 

저는 류샤오동이고
화가입니다

 

영화와 그다지
친숙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본 게 아닙니다

 

처음으로 인상적으로 본 게

 

양덕창의 "청매죽마"였고

 

허우샤오시엔과 차이친이
주연으로 나왔습니다

 

아주 조용한 영화였는데

 

대사 한 마디가 기억납니다

 

천천히 전경이 흐르며
차이친이 말합니다

"이번에 도꾜에 갔었어?"

 

허우샤오시엔이
배경에서 나타나 말하고

 

화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나옵니다

 

멈춤이 없이

 

전문가들은
의견이 다를지 몰라도

 

저는 이 "청매죽마"에서

이 대사와 이 장면이

많은 심리적인 걸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청매죽마" 1985
양덕창

 

아친, 아버지와
라이 아저씨 댁에 갈 거야

 

비디오 좀 갖다드리고

 

바둑 구경도 하게

 

오늘 밤 잘 거야
돌아갈 거야?

 

잘 거야

 

먼저 간다

 

아룡

 

아룡!

 

오다가 도꾜에 들렀어?

 

경유만 했어
묵지 않고

 

이 세계에 애착이 있으면서도

 

거기서 거리를 둡니다

 

끼여들면 더는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이런 미학적 가치가
대단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일 많이 배운 건

 

모든 고정된 가치와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관점이 생기면

어떤 예술가든
화가든 사진가든 작가든

 

이러한 태도로

더 너른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아이웨이웨이/중국 미술가

 

타이완 영화를 처음
뉴욕에서 봤어요

 

뉴욕영화제였다고 생각하는데

 

허우샤오시엔의
"동년왕사"였고

 

뒤에 또 "비정성시"를

1차로 봤어요

 

뭐라고요?
1차로 봤다는 거?

더 설명해야 해요?

 

당시에 허우 감독의
작품들을 보고

아주 놀랐어요

중국어 영화에서

그런 질적인 수준을
기대 못 했어요

 

아주 차분하고 고요하면서

독특한 질감과 리듬이 있었어요

 

"동년왕사" 1985
허우샤오시엔

 

"동년왕사"는 제게
중요한 영화예요

 

바오징징/각본가
영화학교 1학년인 17살 때

 

어느 여름날 밤에

군사 훈련을 마치고

 

야외 상영회가 있었어요

 

각자가 배낭을 메고 있었고

배낭에 담요가 묶여 있었어요

 

배낭을 맨 채
큰 운동장에 모였고

 

담요를 깔고 앉았어요

 

대형 스크린에
영사기를 돌렸어요

 

주위는 아주 캄캄했고

스크린은 밝게 빛났어요

모두가 꼼짝 않고

 

"아쇼고, 아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요

 

바람이 몹시 불었고

 

운동장 주위의 숲에서

나뭇잎들이
팔랑팔랑거렸어요

 

어둠 속에서
화면에 깊이 빨려들었고

 

이제부터 영화를 만들거야
생각했어요

 

감동하고 흥분했어요

 

허우샤오시엔이나
양덕창은

늘 자신들만의
독특함을 유지했어요

인문정신이랄까

 

진정한 예술가가
지녀야 할 것이고

 

아주 개성적인 사고요

 

그런 정서는 당연히
보편적 진실과 연결되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깊은 관심에서 비롯돼요

 

그런 게 중국에서는
사라졌어요

 

아주 특별한 자질인 거요

 

그게 타이완에 나타나면서

 

타이완은 확실히
존중받게 됐어요

 

타이완이 그런 감독들을
배출했다면

 

중국에 대해선
말들이 많아요

 

뭐 하자는 거야?

 

니가 뭐야?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91
양덕창

 

들어가지 마

 

너 때문이야

 

내가 뭘?

 

슬라이와 샤오취가
같이 있다고 했잖아

 

아주 개판 됐어

 

샤오취라고 안 그랬어

그럼 누구야?

 

내 소중한 보물단지

꽉 깨물어주고 싶어

 

샤즈가 아주 샘이 났어

 

하니만 있었으면

이런 일 없었을 거야

 

에즈도 소공원파를
못 건드렸을 거고

 

두 새끼가
두목이 되려고 저래

 

샤오묘, 빨리 와!

 

이제 어쩌지?

 

왜 내가 그날 밤
슬라이와 있다 그랬어?

 

너라고 안 했어
잘 안 보였어

 

너 아니었어?

 

그래, 나였어

 

양덕창의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은

 

이야기가 아주 강력하지만

 

양차오/감독, 왕빙/감독
그러면서도...

어떤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어

 

특별한 역사적 기억을

 

그 기억은 아주 진실해

 

개인적인 진실
개인적인 기억의 진실성

 

기억에는 여러가지가 있어

 

거시적 역사의 기억이 있고

개인의 순간적인
역사의 기억이 있어

 

내 생각엔 이 둘 중에서

타이완 뉴시네마는
보다 개인적인 기억을 보여줘

 

우리는 공산주의의
역사를 거쳤고

그래서 5세대 감독들이

타이완 감독들처럼
하지 못 했어

 

서로 소통하지 못 했어

 

우리의 역사적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해

 

예를 들어 장이모나
첸카이거의 영화들은

훌륭한 작품들이지만

영화적인 한계가 있다고봐

허우샤오시엔과 양덕창의 영화는
이런 문제가 없었어

 

예술적 한계는
안 보인다고 생각해

예를 들어 "패왕별희"의
예술적 주제를 보면

나는 줄거리만 보여

 

가서 영화를 다시 봐

 

다 대사로만 짜여졌어

영상언어의 수준이
아주 높다고 생각해

사람이 없어

- 어?
- 사람이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는 달라

 

허우샤오시엔의 작품엔
어느 장면이라도

 

사람이 있어

 

그래?

 

영화 속에
현실적인 사람들이 있어

 

보통사람들만이 사람이야?

 

아니, 어떤 인물이라도
살아 있어

 

그럼 데이와 샤오루가
사람이 아니라

 

역사적 부호라고 생각해?

 

내 생각엔 집단주의 영화야

 

이걸 바꿔야 하는데
어떻게 바꾸지?

 

영상 스타일이나
영화 형식을

 

바꾸는 것으론 안 돼

제일 중요한 건 사람이고
영화와 사람의 관계야

타이완 뉴시네마를
좋아하는 건

사람과 영화의 관계가
유지되어서야

 

진실하게
그 역사적 진실이 느껴져

맥락을 정확히 규정하면

 

이 영화들이 중요한 건

 

중국 문화 내에서가
아니란 거지

 

중국 문학사를 살펴보면

"사기" 없이는
중국 문학사는 없어

중국 문학사에 뭐가 남아?

 

- 많이 있지
- 어떤 거?

"이소"라던가

 

"구가(九歌)"가 있고

 

- 하지만 그건 다른 두 가지 문제야
- 두 가지 이상이야

맥락 밖의 것을
확대 해석할 순 없어

 

문학이 우리 분야도 아니고

 

다만 이 말을 하는 것 뿐이야

왜 이 책이 내게 중요한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사기"가
살아 있다는 거야

 

여전히 생생하고
또한 진실되게

 

그 점에 의문은 없어

 

내 말은

이 책이 중국 역사에서
독보적이란 거야

 

타이완 뉴시네마도
그런 특색이 있어

왜 그러느냐?

 

집단주의적 작품이 아니어서야

 

개인주의적인 역사 감각으로

 

특정 시기의
어떤 진실을 바라보고 있어

 

그게 중요하고

 

또한 5세대 감독들에게
부족한 거야

 

중국 영화의 가치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중국 영화의 더 큰 문제점을
생각하는 거야

 

정확하게 5대 이전의

 

고대 역사 시기는

역사주의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

 

하지만 5대 이후는

 

개인적인 역사 인식이
일깨워졌고

 

일종의 진보였어

 

그걸 다 무시하고
중요한 변화가 전혀 없었다고

 

한데 몰아붙일 순 없어

 

사람의 가치가 대동됐어

 

타이완 뉴시네마처럼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는
아니더라도...

 

그건 영 다른 거야

 

사실 타이완 뉴시네마에서

제일 관심 있는 건
그 과정의 역동성예요

 

영화인들이 서로
아주 친밀했어요

 

양덕창의 영화에

허우샤오시엔이 출연해요

양덕창의 영화를

 

허우샤오시엔이 제작하고

 

그게 어떤
생활방식이었어요

 

80년대의
타이완 뉴시네마 또한

영화적인 생활방식
같은 거라 생각해요

타이완 뉴시네마가
시들해진 건

타이완의 계엄 해제

타이완의 정치 민주화와
관계 있을지 몰라요

 

당시에 "비정성시"는
내 생각에

 

시대의 필요성에
부응했다고봐요

 

그 이면에 사회가 영화에

 

강하게 요구하는 게 있었어요

 

향수 같은 게 아니라

영화가 가야 할
어떤 길이었어요

 

허우샤오시엔과 양덕창이

 

양덕창의 마지막 날 동안

만났는지 모르겠어요

 

함께 차를 마셨는지

영화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해할 건
그런 생활방식일 거예요

 

"밀레니엄 맘보" 2001
허우샤오시엔

 

여자는 하오하오와 헤어졌다

 

하지만 하오하오는
계속 쫓아다녔다

 

전화해서

 

돌아오라 애원했다

 

거듭해서

 

주문처럼

 

최면처럼

 

달아날 수 없었다

 

늘 돌아갔다

 

속으로 말했다

 

"은행에 50만이 있어

 

50만을 다 쓰면

 

영영 떠날 거야"

 

타이페이

 

차밍량/감독

 

내가...

 

타이완 뉴시네마와
연결된다 생각하지 않아요

 

난 혼자 하고

 

그런 부담 못 져요

영화는 개인적인
작업이라 생각해요

자기만의 창작예요

 

하지만 여전히
나를 끌어들이는 건

 

흥행 때문예요

 

영화를 하나의
창작예술로 여긴다면

 

고전과 같아요

 

관객이 아니라

시간이 결정해요

순간적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걸려요

그게 거기 있으면...

 

무르익기를 기다려요

 

허우샤오시엔/감독

 

타이완 뉴시네마는
광범위할 수 없어요

모든 예술 영화들과 같아요

 

오래 전 어딘가에 존재했어요

 

타이완 뉴시네마의 여파로

영향을 받았던 이들이

 

시련을 겪었어요

 

환경 때문이기도 했고

 

영화가 불경기면

 

어쩔 수 없어요

 

불경기든 아니든

자신의 예술적 표현 형식과
무관해요

 

그건 다른 두 가지요

 

모든 예술적 표현의 뿌리는
바로 그 시대요

각 년대에서 형성돼요

그밖엔 불가능해요

 

지금 뉴시네마가 있느냐?

 

안 보여요

물론 젊은 세대는
늘 새로운 걸 찾고

 

지금은 아주 다른
인터넷 시대요

 

온갖 영상들을 접하지만

 

뉴시네마는 아직 안 보여요

이른바 뉴시네마가 뭐냐?

 

이전에 모든 형식들을 시도했고

 

이제 와 새로운 영상 형식이
나올 수 없어요

 

제일 중요한 건 내용이오

 

그 시대의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