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tle.Forest.Winter.Spring.2015


 

수입 / 배급 : (주)영화사 진진

 

- 우편물입니다
- 네

 

안녕하세요

 

- 춥지?
- 날씨가 춥네요

 

오늘은 낮부터 눈이 온대

 

청구서뿐이에요?

 

편지도 한 통 있어

 

그럼 잘 있어

 

                      

가을에 엄마에게
편지가 왔다

 

                      

코모리는 토호쿠 지방의
작은 마을입니다

 

              하시모토 아이


 

              하시모토 아이

상점 같은 게 없어서

 

              미우라 타카히로
시장을 보려면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까지 나가

 

              마츠오카 마유
농협의 작은 슈퍼나
가게로 갑니다

 

                     

가는 길은 대부분 내리막길이라
자전거로 30분

 

            원작: 이가라시 다이스케
            <리틀 포레스트>
 오는 길은 얼마쯤 걸릴까요?

 

            원작: 이가라시 다이스케
            <리틀 포레스트>

 

                      

겨울엔 눈 때문에
걸어 가야 합니다

 

                      

천천히 1시간 반 정도
걸릴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옆 마을에 있는 큰 슈퍼로
가는 듯합니다

 

                      
내가 거기 가려면
거의 하루가 걸립니다

 

            각본 & 감독
            모리 준이치
 

 

리틀           
                
 

리틀 포레스트 2     
                
 

리틀 포레스트 2     
           겨울
 

             
           겨울   
 

 

오늘은 크리스마스

 

엄마는 이론을
내세우는 사람이라

 

우리 집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 않았다

 

엄마, 우리도
크리스마스 파티해

 

우린 기독교인이 아냐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그래도 어렸을 때
몇 번 손님이 와서

 

그땐 케이크를 구워 주었다

 

첫 번째 요리

 

 

- 어서 오세요
- 안녕하세요

 

들어와요

 

안녕?

 

인사 안해?
옛날에 신세 진 분이야

 

안녕

 

외국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의
옛날 애인이 아니었나 싶다

 

근거는 없지만

 

참 잘 그리네

 

이건 뭐야?

 

가위 바위 보

 

가위 가위 가위...

 

케이크 먹어요

 

엄마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겉모습은 생크림으로 덮인
하얀 직방체

 

나이프로 썰면 단면이
선명한 빨강과 녹색으로

 

크리스마스 색깔이었다

 

정말 예쁘네요
어떻게 만들었어요?

 

정말 어떻게 만든 거야?
대단해

 

알고 싶어?

 

빨강은 붉은 쌀로 만든
감주가 들었고

 

녹색은 시금치가 들었어

 

두 종류의 반죽을
한 형태로 구웠지

 

세로로 두 색깔이 되다니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만들었죠?

 

그건 알아서 생각하세요

 

- 잘 있어요
- 안녕히 가세요

 

괜찮아요?

 

못 말린다니까

 

한 개가 남아 있었지

 

안녕

 

그 사람은 3번 정도
오고 나선

 

오지 않았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케이크도 끝!

 

나 먹어봤어

 

- 중학교 때
- 기억 안 나는데

 

아마 후쿠코 씨가
사라지기 전 해였을 거야

 

그때 먹어봤어

 

난 모르는 일인데

 

난 후쿠코 씨한테
자주 책 빌려 봤어

 

책 많았었잖아

 

커다란 전집이나
사전 같은 거

 

그러고 보니 자주 왔었어

 

너무 네 칭찬을
많이 하는 바람에

 

우리 집, 책에 흥미도 없었는데
읽기 시작했어

 

그랬더니 갑자기

 

"자기가 읽을 책은
스스로 찾아"

 

그렇게 말하고
헌책방에 다 팔았어

 

아마 돈이 없어서였겠지

 

나도 옮기는 거 도와드리고
몇 권 얻었어

 

케이크를 구웠다는 건
남자가 있었단 말인가?

 

이 케이크는 뭐야?

 

난 계속 붉은 쌀 농사
안 지었잖아

 

붉은 쌀은 이삭도 빨개서
논은 예쁘지만

 

알맹이가 떨어지기 쉬워
수확하기 귀찮잖아

 

근데 검은 쌀은
품종개량한 거니 괜찮아

 

매년 농사 지어서

 

검은 쌀로 감주를 만들어

 

수분을 적게 하고
농도를 짙게

 

검은 쌀은 찹쌀 종류라
꽤 달다

 

감주는 새까맣게 되지만

 

설탕, 기름, 밀가루

 

베이킹파우더를 섞어
반죽을 만들면

 

보기 좋은 보라색이 된다

 

보라색엔 노란색이 어울려
호박으로 반죽을 만든다

 

틀에 검은 쌀 반죽을 반보다
조금 적게 넣어

 

그 위에 호박 반죽을
8부 정도까지 넣고

 

오븐에 굽는다

 

다 구워지면 부풀어진 면을
밑으로 해서 식힌다

 

그럼 모든 면이 평평해진다

 

그렇게 빵의 색을
세로로 한 다음

 

생크림으로
장식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렇게 하는구나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시작하자
크리스마스 차 마시는 시간

 

아냐, 이건 송년
차 마시는 시간이야

 

이 케이크도 보라색
노랑, 흰색 3색깔

 

크리스마스 색깔 아니고
너희들도 신자가 아니잖아

 

따지기는

 

그냥 맛있게 먹자고

 

내년에도 잘 부탁해

 

잘 부탁합니다

 

- 잘 먹겠습니다
- 잘 먹겠습니다

 

맛있어

 

- 응, 맛있어
- 맛있어

 

호박이야?

 

 

두 번째 요리

 

안녕하세요

 

마을 소식입니다

 

이치코
고생이 많구나

 

- 뭐 그리고 있어?
- 표고버섯

 

만두 만들었어
먹어 봐

 

감사합니다

 

"이치코 언니는
뭘 제일 좋아해?"

 

...란 질문을 받았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방금 만든 낫토 떡

 

낫토에 설탕간장을 섞어

 

바로 찧은 따뜻한 떡을
뜯어 넣은 것

 

분교에서 떡 찧는
대회가 있었다

 

벌써 16년 전

 

어머니들 여럿이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다 됐어요

우린 낫토를 파낸다

 

눈 밑에 묻어놨던 거다

 

잘 만들어졌구나

 

낫토 만들기는
3일 전에 시작한다

 

부드럽게 삶아낸 콩을
볏짚으로 싼다

 

이때 속에도 짚을 한 묶음
넣어두면 발효가 잘된다

 

눈 속을 파내

 

멍석을 깔고

 

짚을 담요 삼고

 

눈 이불을 덮어준다

 

눈 밑엔 여러 가지 것이
묻혀 있다

 

배추, 파와 시금치

 

무와 당근은 땅속에

 

쥐를 피하기 위해
쇠뜨기로 덮어놓고

 

채소는 저온에 두면
감기에 걸려 못쓰게 되니

 

눈 이불에
보관하는 것이다

 

묻어두면
온도는 일정하다

 

그 방법으로
낫토도 만든다

 

맛있게 해 주세요

 

맛있게 해 주세요

 

영차, 영차

 

제대로 찧지 않으면
맛있는 떡이 안 돼

 

무거우니까 잘 들어

 

- 괜찮아?
- 힘 내

 

빨리, 빨리 가자

 

좋아
섞어줄래?

 

떡이 안 들러붙게

 

됐어
맛 좀 볼래?

 

괜찮아요?

 

떡은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으니까

 

먹어 보거라

 

정말 방금 만든
아직 따뜻하고

촉촉하고 부드러운 떡

 

설탕간장이 듬뿍
들어간 낫토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언제까지나
계속 먹고 싶다

 

처음 먹어본 설탕간장이
들어간 낫토 떡

 

찧기 전에 반죽이 중요해

 

엄만 코모리에 살기 전엔

 

낫토 떡을 먹은 적이 없다

 

'우리집 낫토 떡' 맛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영차, 영차

 

- 혼자 하고 싶어요
- 괜찮겠니?

 

괜찮을까?

 

이때부터

 

나 치지 마

 

금방 쪄낸 낫토 떡은
진한 설탕간장 맛으로 정했다

 

낫토균은 볏짚에 붙어 있다

 

그래서 우리 집 찹쌀은
낫토 떡을 만드는 데 쓴다

 

우리가 빌려 쓰는 논까지
자전거로 10분

 

올해는 꽃이 필 시기에
비와 저온현상이 왔고

 

걱정돼 매일 보러 갔다

 

벼는 사람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벼 수확도 비 오는
추운 날을 피하느라

 

마을 사람들 모두
분주했다

 

올해 찹쌀 농사의 성과가

 

지금...

 

지금...

 

지금...

 

잘 먹겠습니다

 

분교는 현재 폐교가 되어

 

가끔 마을회관 대신
사용되고 있다

 

코모리에 눈이 온다

 

제설차 오늘 길까지
확보해둔다

 

세 번째 요리

 

우편물입니다

 

 

- 안녕하세요
- 여기

 

얼린 무말랭이 만들었구나

 

- 말씀해 주신 대로
- 그러네

 

반으로 잘라

 

껍질을 벗겨

 

세로로 잘라

 

구멍을 뚫어

 

끈으로 연결해서

 

그대로 밖의 추위에
얼려서 말리면

 

일년 내내 보관할 수 있는
얼린 무말랭이가 된다

 

생으로 말려도 괜찮아요

 

여기선 삶아서 얼리지?

 

우리 마누라 친정 쪽에선
이렇게 한대

 

시간 없을 땐
이것만 먹어도 맛있으니까

 

- 가 볼게
- 네

 

잘 있어

 

조림 요리엔 반드시
얼린 무말랭이 가 있어야 한다

 

물에 해동한 무말랭이를

 

쌀뜨물에 불린
말린 청어 등과 함께 졸이면

 

맛이 배어들어
정말 맛있다

 

계절 채소도
함께 조리하는데

 

특히 산 두릅이나
죽순이랑 궁합이 맞다

 

무를 얼리면서
봄이 너무 기다려진다

 

잘 먹겠습니다

 

가을에 감이 단단할 때

 

가지 채로 따는 것은
곶감을 위해서다

 

잡았다

 

이건 따기 힘드네

 

올해는 풍작이네

 

풍작이야

 

너무 많이 땄나 봐

 

너무 딴 것 같아

 

간다

 

하나 둘

 

- 됐나?
- 손 뗄게

 

색깔 한번 좋구나

 

감꼭지를 남겨두고
껍질을 벗겨

 

T 자 모양 가지를
먹줄에 껴서 처마 밑에 매단다

 

가끔 손으로 주물러주면
부드러운 곶감이 된다

 

그대로 차에
곁들여도 좋지만

 

잘게 썰어서

무 절임에 넣으면
식초와 곶감 단맛이 상승하여

 

색도 예쁘고 맛있다

 

여기 갖고 왔어
먹어 봐

 

- 잘 먹을게
- 맛있게 먹어

 

너무 맛있어

 

추우면 힘들긴 하지만

 

춥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것도 있어

 

추위도 소중한
조미료 중의 하나다

 

네 번째 요리

 

너희 집
굴뚝 청소는 했어?

 

우린 팬히터로 바꿨어

 

좋겠다

 

너도 바꾸지 그래

 

기름값이 장난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여기서 나갔을 때

 

 

쌀이랑 된장은
갖고 갔어

 

근데 채소는
사 먹어야 하잖아

 

불길이 세졌어
고구마 갖고 와

 

알았어

 

처음부터 수도세랑
하수도세를 내라더라고

 

코모리에선 필요 없는
돈인데

 

자기 관리니까

 

청구서 왔을 때 당황했어
생각도 안 했거든

아껴 써야겠다 싶었지

 

처음엔 매 끼니를
인스턴트 라면하고 밥만 먹었다

 

스프에 고기랑
채소 건더기가 있으니까

 

너무 심했잖아

 

그래서 채소라도
길러볼까 하고

 

컵라면 컵에 흙을 담아서

 

우선 순무 씨를 뿌렸어

 

한 달 정도 걸리잖아

 

어서 오세요

 

알바하면서
친해진 남자애가 있었어

 

뭐 찾는 거야?

 

토마토 캔을
누가 찾던데

 

스파게티 코너에 있어
이쪽

 

- 여기 있잖아
- 역시 잘 찾네

 

아깐 고마웠어

 

아냐, 괜찮아

 

- 수고했어
- 너도

 

꽤 말랐네

 

여기

 

이거 좀 무거워

 

전혀 안 무거운데

 

- 괴력이네
- 뭐야

 

- 여기
- 좋아 좋아

 

그게 밥이야?
항상 빵 한 개 먹어?

 

비타민도 챙겨 먹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도 남말 할
처진 아니지만

 

우리 집 쌀에

 

된장을 발라 구운
주먹밥

 

그리고 즉석 순무 절임

 

거기다 엄마의
특제 달걀말이

 

달걀말이 맛있어

 

꿀이 포인트야

 

전부 재배한 거야?

 

역시 넌 대단해

 

달걀은 안 키워

 

그럴 줄 알았더니

 

오늘은 늦네

 

얼마 전에 손으로 짠
머플러 받았는데

 

우와, 무서워
집착 쩐다

 

바람 피우면
죽는거 아냐?

 

무서운데
버리지 그래

 

선물은 사서 하란 말야

 

만들 시간 있으면
일해서...

 

지당한 말씀

 

그래서 도시락
안 전해 준 거야?

 

 

그런 놈들 있지만
먹는 건 다른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나 중학교 갔을 때 말야

 

본교 나온 애한테
왕따 당했잖아

 

분교 나온 촌뜨기라고

 

같은 마을에서
무슨 짓이었는지

 

왠지 그때랑
비슷한 기분이었어

 

한 걸음을 못 떼는 바람에
결국 그대로...

 

- 냄새 좋지 않아?
- 응

 

부드러워졌어
익었나 봐

 

- 뜨거워
- 목장갑 쓸래?

 

익었나?

 

내열 벽돌을
스토브 위에 올렸구나

 

복사열이 스며들어 좋아

 

이 위에 냄비 올리면
카레 데울 때도 안 타

 

편리하겠다

 

게다가 군고구마도

 

고구마 보존이 잘됐나 봐

 

많이 안 추웠잖아

 

맛있어

 

앗 뜨거

 

올해엔 꼭 제대로 된
땔나무 창고를 만들어야지

 

언 나무를 쪼개는 건
너무 힘들어

 

스트레스는
단 걸로 해소한다

 

다섯 번째 요리

 

그래서 추운 계절에
팥은 없어선 안 된다

 

떡 같은 데 넣어도 되고

 

밀가루, 소금, 베이킹파우더를
물로 반죽해

 

한 시간 둔 다음에

 

팥을 숙성시킨 반죽에 싸서

 

프라이팬에 구워도 되고

 

쪄서 찐빵처럼 먹어도 된다

 

우리 집 땅 같은 경우엔
팥밭에 비료가 필요 없다

 

비료를 뿌리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다

 

초여름이 되면 밭에 뿌려
그대로 둔다

 

비가 많은 해엔 포기한다

 

여름

 

아래쪽부터 꽃이 피고
떨어지면서

 

가을이 시작될 무렵
팥꼬투리가 두터워진다

 

난 참지 못하고
덜 여문 팥을 먹어버린다

 

아직 덜 익은
팥꼬투리를 벌리면

 

촉촉한 연보라색의
어린 팥이 고개를 내민다

 

단단해지기 전이라

생각날 때 살짝 쪄서
먹을 수 있어 좋다

 

희미하게 팥의 향이 난다

 

수프 건더기로도 좋고

 

달게 찐 팥을
반죽과 잘 섞어

 

머핀 용기에 넣고 굽는다

 

말랑하니 향도 좋다

 

팥을 삶아 살짝 익힌 후

차게 해서 그냥 먹는다

 

맛을 음미하면서
먹어야 맛있다

 

일 년 내내 즐기기 위한
보존용은

 

갈색이 된 팥꼬투리부터
차례로 수확한다

 

밭에 오래 두면
꼬투리가 터져 버린다

 

장마 탓에 안에 든 채로
발아한 것도 있다

 

난 꼬투리 심의 녹색이
사라지는 걸 기준으로 수확한다

 

비둘기가 먹는다고
빨리 수확하는 집도 있지만

 

우리 밭은 비둘기에게
당한 적이 없다

 

불성실한 탓에 잡초에 가려
안 보이기 때문일까

 

수확하면 우선 꼬투리가
바싹 마를 때까지 말려

 

나무 망치로 두드려
팥을 분리한다

 

그리고 팥만
햇볕에 말린다

 

가을 농번기 때라

 

일단락될 때까지
한 달 정도 말린다

 

세심한 작업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정도 말리면 향도 좋아지고
벌레도 안 먹는다

 

겨울이 시작되면

 

팥알이랑 찌꺼기를 분리

 

병에 넣어 보존한다

 

귀찮아 죽겠네
너무 많이 재배했나 봐

 

이때 알이 굵은 팥은
따로 담아둔다

 

그걸 다음 봄이 끝날 때
밭에 뿌리기 위해

 

코모리에선 팥을 뿌리는
날이 매년 정해져 있다

 

빨라서도 안 되고
늦어져도 안 된다

 

싹이 나올 때
너무 춥거나

 

햇볕이 필요할 때
장마가 들거나

 

성장과 날씨가 안 맞으면
벌레나 병이 생기기 쉽다

 

다른 작물도
각각의 파종 날짜와

 

계절마다 산의 꽃이나
새의 상태를 살펴야 한다

 

옛날부터의 경험이
쌓여서 그런 거죠

 

그렇지, 뭐든
좋은 타이밍이라는 게 있으니

 

맞아요

 

맞아
아마도...

 

나도 여길 나가는 게
너무 빨랐다

 

그랬을 거다

 

조바심내는 건 금물

 

팥소를 만들 때도
설탕을 빨리 넣으면

 

아무리 쪄도
팥이 물러지지 않는다

 

설탕을 넣는 건

팥이 손가락으로도
쉽게 으깨지고 나서다

 

눈이 내릴 땐
수제비가 먹고 싶어진다

 

수제비 반죽은
밀가루를 물로 반죽해

 

귓불 정도로 부드러워지면
2시간 이상 재운다

 

충분히 재우지 않으면
쫀득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눈을 치우기 전에
준비해 둔다

 

잘 재운 반죽을
손으로 잡고 얇게 늘려서

 

찢어 국물에 넣고
끓인다

 

잘 먹겠습니다

 

눈 치우고 배가 고파졌을 때
먹어야 맛있다

 

오늘은 색다르게
밀기울을 섞어 보았다

 

여섯 번째 요리

 

밀기울이란 건 보통 땐
제분 과정에서 제외되는

밀의 껍질 부분이다

 

몸에 좋을 것 같은데

 

그런데 이건...

 

뭐더라?
뭐였더라

 

멸치의 머리와
내장을 따고

 

물에 불린 표고

 

당근

 

 

우엉

 

토란

 

유부를 잘라서

 

물, 술, 맛술과 함께
냄비에 넣는다

 

간은 나중에
간장과 생강즙으로 한다

 

숯불에 잘 달궈진
스토브에 올려둔다

 

너무 예뻐

 

잠시 걸어볼까

 

어제 키코랑 다퉜다

 

키코의 직장 동료
얘기를 하다가

 

애초에 도와달라고 한 건
상대방이었어

 

아무리 상대가
도와달라고 해도

 

하나 하나 다 도와주면
상대에게도 안 좋아

 

진정 그 사람을
생각한다면...

 

이치코

 

너 뭐라는 거야?

 

응?

 

뭘 하는 게
그 사람을 위하는 건지

 

뭐가 그 사람을 위한 게
아닌 건지

 

다 알 만큼
겸험이 풍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넌 항상 다 아는 것처럼
쉽게 말을 하는데

 

말뿐이잖아

 

그런 말 할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을 겪어 봤어?

 

토끼다

 

구름이 흘러가고

 

해가 비치면

 

나뭇가지의 눈이 떨어진다

 

그림자가 지면 멈춘다

 

해가 비친다

 

난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고

 

그래서 코모리로 돌아왔다

 

난 참 바보야

 

참, 눈 치워야 하는데

 

어서 와

 

카레 만들어 왔어
같이 먹자

 

 

어제 심하게 말해서
미안해

 

아니야

 

- 밥 안칠 테니까 잠깐만
- 카레 데울게

 

이거 빵이야?
수제비야?

 

 

근데 그거 말야

 

 

그거였구나

 

위에 이걸 뿌리고

 

여기 놓는 거지

 

세 개면 되나

 

세 개로 잘라

 

밀대로 얇게 펴서

 

그걸

 

뜨겁게 데운 석쇠에
센불로 양면을 굽는다

 

이거 밀어 둘게

 

키코
이거 봐

 

대단하네
볼록볼록 올라오잖아

 

부풀고 있어

 

부푸는구나

 

- 이어져
- 이어지네

 

다 부풀었어

 

- 이걸로 됐어?
- 됐어 됐어

 

뒤집어 보자
뒤집어

 

맛있게 생겼어

 

- 이게 뭐야?
- 차파티

 

차파티?

 

원래는 하룻밤
재워야 하는데

 

- 수제비랑 똑같네
- 응, 똑같아

 

맛있는 거 만드는 방법은
세계 공통이구나

 

- 먹어 봐
- 너무 맛있겠어

 

스파이시
본격 인도풍 치킨 카레

 

- 그럼
- 잘 먹겠습니다

 

- 맛있어
- 응

 

정말 맛있네

 

차파티 맛있어

 

내일 국물 맛있게 우려서
새로 수제비 해 먹어야지

 

- 출발한다!
- 좋아

 

- 최고야
- 지쳤어

 

내일도 눈 치워야지

 

기분 정말 좋아

 

일곱 번째 요리

 

저장 채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아까워서 열지 않았던
염장 채소를 꺼낸다

 

봄에 캔 고사리

 

모내기가 끝나면
코모리 아줌마들은 산에 올라가

 

- 안녕하세요
- 안녕

 

고비랑 고사리
이만큼 캤어

 

짊어지지도 못할 만큼
고사리를 캐 온다

 

뿌리 부분을 당겨
간단히 부러지는 데부터 딴다

 

싹이 피기 전이 좋다

 

바로 먹을 건
스토브 재를 뿌려

 

뜨거운 물에 담궈 하룻밤

 

떫은 맛이 빠진다

 

소금에 절일 것은
그대로

 

어쨌든 소금을
아끼면 안 된다

 

소금에 푹 담가두지
않으면

 

왠지 흐물거리게
돼 버린다

 

망했네

 

먹을 땐 하룻밤
물에 담궈 놨다가

 

소금기를 빼고
살짝 데쳐서 먹는다

 

잘 먹겠습니다

 

생강간장하고 먹으면
깔끔하고 맛있다

 

조림에 넣거나
된장국 건더기로도 넣고

 

다들 일 년 내내 먹지만

 

난 '카바네 야미'라
항상 모자라다

 

'카바네 야미'란
게으름뱅이를 말한다

 

고사리뿐만이 아니다

잠시 짬 내는걸 못해

 

모처럼 얻은 수확물을
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해 코모리 사람들은
부지런한 일꾼들이다

 

오늘 오시라고 한 것은

 

이 마을 동쪽에 있는
경사 진 휴경지 말인데

 

이곳 관리가
잘 안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주변 농지에 노린재가
생길 수 있다는 보고가

 

농협이나 관계 기관에서
올라왔는데요

 

그래서 새롭게
자료를 배포하려 합니다

 

이 자료의 3페이지를
펴 보시겠습니까?

 

글자가 작아서
잘 안 보일지 모르겠지만

 

여기 적힌 대로
이 농지를 유효하게 활용해서

여러분들 수입도
나아지게 하고

 

그리고 코모리의 농지도
이 주변의 경치도

좋게 발전시키고 싶은 게
저희 생각입니다

 

이치코, 이제 됐으니까
그만 앉아

 

옛날엔 여기가
전부 숲이었거든

 

그래서 숲의 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 베어서

 

뭐 지금처럼 기계가
있었으면 편했겠지만

 

손으로 하나 하나
뿌리를 파내서

 

그렇게 지금 같은
논으로 만든 거야

 

코모리는 돌이 많아서

 

가끔 큰 돌이 나타나면

 

굵은 나무를
지렛대처럼 사용해서

옮기곤 했지

 

옛날엔 말도 쓰고
소도 썼었어

 

그러다 그 후에 경운기나

트랙터까지 오게 됐지만

 

우린 정말 별일 다하며
살아 왔어

 

우리 남편은 그 전부터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전기톱을 들여놓고부터는

어떤 큰 나무라도 두부처럼

 

싹둑싹둑 자르게 됐지

 

여긴 다 경사진 곳이잖아

 

경운기가 넘어지면서
바퀴가 빠지는 바람에

 

얼마나 무겁던지

 

다리가 부러질 뻔했어

 

그럴 때도
그것만 하는 게 아니라

 

열 종류가 넘는
채소를 키우고

 

곡물을 재배해

 

먹을 수 있게끔 가공하고

 

집안일도 하면서

 

아이도 돌보며

 

산으로, 들로
일하러 나가고

 

월동 준비를 한다

 

매일같이

 

매일같이

 

매일같이

 

요새 유타는
코모리의 장래에 대해 얘길 한다

 

휴경지 말야

다들 나이가 많으시니
우리가 뭐든 해야겠지

 

 

있잖아

 

혼자서 열심히 살아가는 거
대단하다 생각하는데

 

한편으론 제일 중요한
뭔가를 회피하고

 

그 사실을 자신에게조차
감추기 위해

 

'열심히' 하는 걸로
넘기는 거 아닌가 싶어

 

그냥 도망치는 거 아냐?

 

난 아무 말도 못했다

 

녀석도 코모리에서
제대로 살려고 하니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코모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이곳 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런데 나는...

 

겨울이 끝날 무렵엔
어김없이 폭풍우가 온다

 

엄마의 편지엔

'원'이라든가 '나선'이란 말이
나열돼 있을 뿐

 

어디서 누구랑
뭘 하고 사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날은 눈보라와 봄햇살이
교차하는 폭풍우였다

 

다시 개었구나

 

파란 빛과 먹구름이
반으로 갈린 하늘을 봤다

 

내 상태랑 똑같아

 

다녀왔습니다                

 

라고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멀리서 생각들이 둘러싸네          

 

그날의 기억도
향기도                   

 

다녀왔습니다                

 

라는 소리가
이젠 들리질 않아              

 

그 소리가 울려퍼지는
귓속에서는                 

 

언제까지나
그 언제까지나               

 

돌아갈래
그때의 나날들로              

 

아직 열심히 모으고 있어           

 

지금 느껴
그때 잃어버린 것들을            

 

아직도 아직도
아직도 아직도                

 

언제까지나 연결된              

 

나를 만든 공기를 흡수해           

 

보이는 건
단지 보이는 건               

 

단지 보이는 건
단지 보이는 건               

 

단지 보이는 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어                 

 

다시 돌아온
이곳에                   

 

지금 감사하고 있네             

 

눈물만 계속 흘릴 뿐
또 다시 만났으니까             

 

정말 다행이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어딘가에서 본
그 몸짓은                 

 

사랑스러워
사랑스러워                 

 

앞으로도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을 테야             

 

코모리는 토호쿠 지방의
작은 마을입니다

 

상점 같은 게 없어서

 

시장을 보려면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까지 나가

농협의 작은 슈퍼나
가게로 갑니다

 

가는 길은 대부분 내리막길이라
자전거로 30분

 

 오는 길은 얼마쯤 걸릴까요?

 

겨울엔 눈 때문에
걸어 가야 합니다

 

천천히 1시간 반 정도
걸릴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옆 마을에 있는 큰 슈퍼로
가는 듯합니다

 

내가 거기 가려면
거의 하루가 걸립니다

 

리틀           
                
 

리틀 포레스트 2     
                
 

리틀 포레스트 2     
           겨울
 

             
              
 

 

첫 번째 요리

코모리엔
매화와 자두 벚꽃과

 

첫 번째 요리   



 

첫 번째 요리

산나물과 모내기가
한꺼번에 온다

 

첫 번째 요리   



 

산에 가면...

 

방풍나물이 나왔다

 

무쳐 먹거나 튀기면
향도 좋고 맛있다

 

우선 챙겨둬야지

 

연령초

 

엘레지 꽃

 

아네모네

 

시라네 접시꽃

 

두릅
이것도 챙겨둬야지

 

오갈피는 어떡할까?

 

청나래 고사리

 

벌써 다 따갔으려나?

 

잘 먹겠습니다

 

두 번째 요리      



 

두 번째 요리

코모리엔 몇 년에 한 번씩
엄청난 눈이 내린다

 

눈 와?

 

너 좀 일찍 일어나라
같이 눈 치워야지

 

버스 올 시간이라 갈게

 

키코한테 머위된장
만들어주기로 했어

 

눈 때문에 일 못하잖아
엄마

 

좀 뜯어 줄래?
그것만 해 주면 돼

 

다녀오겠습니다

 

도로까진
치워놔야 하는데

 

눈에 머위가
다 파묻혔을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기나 하는 거야?

 

뭐 괜찮겠지

 

키코

 

안녕
눈 정말 많이 왔지?

 

어젯밤부터 왔지?

 

이젠 봄인데
그래도 마지막 눈이겠지

 

5월에도 내린 적 있지?

 

뭐?
하긴, 그러네

 

아직 멀었어

 

어라?

 

다녀왔습니다

 

엄마?

 

머위된장 해 놨네

 

단맛이 부족해

 

모임에 간 건가?

 

엄마는 그대로
없어져 버렸다

 

이봐, 이치코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당신은

 

집안일은 전부
부인이 다하고

 

돌아가면 집은 따뜻하고
저녁밥이 기다리고

 

피곤하다 말만 하면
되겠지

 

빨래가 밀리면
불평이나 하면 될 테고

 

아무리 피곤해도
난 전부 내가 해야 해

 

돈 버는 것도 집안일도

 

같이 해주는 사람이 없어

 

여기서 돈 버는 동안은
집안일은 하나도 못하고

 

한 번에 하나씩밖에 못해

 

눈 치우는 동안엔
절대 장작을 못 패지

 

자기 싫은 일
가족에게 미루는 주제에

 

바쁜 듯 잘난 척 말라고

 

난 뭐든 혼자 해야 하니까

 

가족에게 응석 부리는
당신들은 내 심정을 몰라

 

일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이 없는 게 얼마나...

 

엄마

 

나는 엄마에게 있어
진정한

 

가족이었을까

 

이치코

 

이치코

 

밥 더 줘

 

- 몇 그릇째 야?
- 세 그릇

 

머위된장 위력이란...

 

위험할 정도지

 

머위된장은 냉장고에서
1년 간대

 

무리야
그 전에 다 없어져

 

우리 엄만 시간 없을 때
국그릇에 머위된장 넣고

 

뜨거운 물 부어
된장국이랬어

 

고마워

 

- 맛있을 것 같은데
- 응 괜찮아

 

뜨거운 물 있어?

 

- 이거 꽤 맛있네
- 그치?

 

완전

 

맛있어

 

세 번째 요리

 

이건 쇠뜨기의 뿌리

 

이 정도만 남아 있어도
금방 번져서 자라나

 

땅을 깨운다
뿌리를 뽑는다

 

땅을 깨운다
뿌리를 뽑는다

 

쑥 뿌리, 고사리 뿌리
쇠뜨기 뿌리

 

작년에도 그렇게나
뽑았는데

 

땅을 깨운다

 

뿌리를 뽑는다

 

밭에 쇠뜨기가
극성이라

 

먹어서라도 없애야겠다
생각했는데

 

너무 많이 뜯었더니
껍질 까는 것도 일이다

 

세심하게 하나 하나

 

시간도 걸리고
어깨도 결리고

 

하지만 껍질을 벗겨야
먹을 때 입에 남지 않는다

 

손가락이 까맣게 됐다

 

끝나면 삶아서

 

간장과 맛술과
술을 넣어 조린다

 

그럼 부피가 줄어서

 

산처럼 많던 쇠뜨기가
이렇게 돼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
이것만 남아

 

게다가 고생한 거에 비해
볼품없지

 

이 바쁜 시기에
고생해서 얻은 게 달랑 이거야

 

사치스럽고
아까운 음식이라 할 수 있지

 

먹어 봐
쇠뜨기 조림

 

여기

 

쇠뜨긴 역시 잡초야

 

쇠뜨기가 무성하면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어

 

뿌리는 가늘어서
뽑기도 힘들고

 

그렇긴 하지만

 

쇠뜨기가 나기 쉬운
환경을 만든 건 사람이야

 

숲을 파헤쳐서

 

그 전에
죠몬 시대였을 땐

 

쇠뜨기가 나는 장소가
얼마 없어서

 

잡초가 아니라

귀중한
산나물이었을지도 몰라

 

봄을 알리는
소중한 산의 은혜로

 

옛날 인간들은 쇠뜨기를
소중하게 생각했을지도

 

뭐라고 할까

 

갸륵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대지의 정령 같은 건
아니었을까?

 

거기다 이거
엄청 맛있네

 

쇠뜨기 향도 나고

 

역시 넌 요리를 잘해

 

다 됐다

 

- 불 들어와?
- 들어와

 

고마워

 

이 녀석은
분교의 2년 후배다

 

난 아무래도

 

낭만적인 말을 하는
키 큰 남자에게 약한 것 같다

 

바빠지기 전에 내년에 쓸
장작을 패 놓아야 한다

 

네 번째 요리

 

- 안녕하세요
- 그래

 

장작 패는 거
도와주러 왔어

 

할아버진 산에
가시는 거야?

 

 

점심 먹으려던 참이야

 

점심~

 

달래 따러 갈 거니
도와줘

 

소쿠리 가져와

 

- 여기?
- 응

 

여기

 

집 근처에
나 있는 산달래

 

그거 엄청 크네

 

작년에 파종이 늦어서
속이 안 찬 배추

 

밭에 그냥 놓아두면

 

눈 밑에서 살다가

 

봄에 싹이 나
꽃봉오리를 맺는다

 

이거 말야

 

어린 잎을 따서
국 건더기로 쓰거나

 

봉오리를 무치면
꽤 맛있어

 

보통은 꽃이 나면
못쓴다잖아

 

꽃이 피면 뿌리 부분이
굵어지지 못하고

 

잎사귀는 질겨지니까

 

하지만 이건
봉오리를 따는 거라

 

산나물보다
빨리 먹을 수 있어서 좋아

 

달래는 씻는 게 귀찮아

 

너무 많이 캤나?

 

남겨뒀던 송어를 굽고

 

스파게티를 삶는다

 

달래와 마늘을
기름으로 볶고

 

스파게티 삶은 물을
소스로 넣고

 

다 익어갈 무렵
꽃봉오리를 넣어

 

소스와 섞어준다

 

송어와 달래,
배추의 꽃봉오리 파스타

 

있는 거 다 넣었는데
어때?

 

달래의 쌉쌀한 맛이 좋아

 

스파게티 대신에
감자 넣으면 반찬이 되겠어

 

감자 싹이 많이 나왔던데

 

캐긴 하는데
끝물인 것 같아

 

감자 싹은
독이라고 했었지

 

그럴걸 아마

 

윗사람 차에다 넣을까

 

왜 그래?

 

아냐

 

너 기합 팍
들어가 있어

 

있잖아
우리 회사 상사 최악이야

 

자기의 좁은 인맥밖에
안 보이는지

 

회의 자리에선
사장에게 아부를 끝없이 해

 

회의에서는
또 사람을 차별하고

 

유능한 척
온갖 일을 다 도맡아선

 

결국 자기 궁지에 몰려
끝도 못 맺고

 

결국 주위사람한테
당연한 듯이 다 맡겨버려

 

기막혀서 정말

 

실패는 남의 탓

 

성공은 자기 덕

 

장작 패면서
다 풀고 싶었구나

 

그 순간만 모면하면 되는
책임감이라곤 하나 없는...

 

그리고, 그리고
또...

 

너 뭐 하는 거냐?

 

남의 욕만 해대고

 

  남의 단점이 보인다는 건

 

자기한테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이야

 

덩치만 커지면 뭐하냐

 

한심해서 원

 

할아버지한테 혼나는 거
오랜만이다

 

뭔가 시원해졌다

 

키코, 너도
봄엔 정서불안이구나

 

그럴지도

 

다 팼구나

 

다 팼어

 

다섯 번째 요리

 

배추흰나비는 해충이야

 

배추흰나비는 죽인다

 

이게 조건반사처럼
되었다

 

옛날에 엄마랑
시내 나갈 때

 

같이 탄 사람들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녀석들은 씨 뿌리고
모종 심을 때부터 찾아온다

 

매일 매일 잎의 앞뒤를
확인해야 한다

 

뾰족뾰족하게 붙은 알을
보는 즉시 뭉개 버린다

 

그렇게 해도

 

이렇게 먹어놓고
흔적을 남기다니

 

이렇게나 많이

 

이렇게나 크게

 

난 배추흰나비에겐
관대하다

 

버스 일도 있고 해서

 

하지만 배추벌레는
용서할 수 없다

 

양배추는 배추와는 달리

 

통째로 속이 꽉 차 있는
우수한 채소이다

 

갓 딴 봄 양배추는 그냥
먹어도 굉장히 맛있다

 

거기다 들기름이나
올리브 오일에

 

소금을 조금 뿌려 먹으면
부드럽다

 

단맛도 더해져서
멈출 수 없게 된다

 

겉에 있는 단단한 잎은
뭘 해도 그냥 그렇지만

 

싹둑싹둑 썰어
튀기면...

 

단맛과 씹는 맛이 좋다

 

양배추의 약점은 비

 

단단하게 속이 익은
양배추는 비를 맞으면

 

터져 버린다

 

코모리 사람들은
이 시기가 되면

 

어슬렁 거리며
남의 밭을 살핀다

 

상태가 어때?

 

잘 컸어요

 

그렇네

 

이치코 안녕

 

안녕하세요

 

뭐 심었어?

 

- 어이
- 어이

 

양배추 아직 있어?
보고 오라더라

 

익어가는 양배추를
나눠주기 위해서다

 

매년 너무 많이 재배해서
다 못 먹어서다

 

알고는 있지만 날씨를 모르니
많이 심을 수 밖에

 

양배추 먹는 법
좀 새로운 거 없을까

 

다음 걸 수확해야 하는데

 

양배추는...

 

달다

 

과자

 

케이크

 

당근 케이크가 있으니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손으로 갈 수 없으니
믹서로 해야겠다

 

밀가루, 설탕, 달걀

 

건포도 같은 건 빼고
일단은 심플하게

 

그럼 버터 말고
샐러드 오일로 해야겠어

 

포인트로 향신료를
넣어야 하나

 

양배추니까 생강이
어울릴꺼야, 생강즙으로

 

틀림없이 맛있을 거야

 

왜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 못한 거지?

 

당근 케이크에 이어

 

새로운 케이크가
탄생할 예감이 들어

 

나 천재인가 봐

 

구워지는 냄새가 나네

 

새로운...

 

어라?

 

많이 맡아 본 냄새인데

 

세계 최초인데 왜...

 

맡아본 적이 있어

 

양배추

 

밀가루

 

달걀

 

생강

 

어때?

 

부침개 맛이야

 

소스 있어?

 

봄에 처음 심는 것 중에
감자가 있다

 

여섯 번째 요리    



 

여섯 번째 요리


되도록 빨리 심고 싶다

 

하지만 눈이 녹기
시작해도

 

한꺼번에 녹은 눈 때문에
밭은 질척질척

 

작업은 땅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눈이 내리기 전
작년부터 밭을 갈아

 

바로 심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농업용 비닐을
덮어두었다

 

눈이 내리고

 

눈이 녹고

 

비닐에 구멍을 뚫어
같은 간격으로 감자 씨를 놓고

흙을 덮는다

 

지금은 아직 춥지만

 

감자싹이 자라
얼굴을 내밀 때쯤에는

 

서리 걱정은 없을 정도로
따뜻해져 있을 것이다

 

계속 나오는 싹은

 

한 줄기에 3, 4개씩만 남기고
다 따 버린다

 

안 그러면 작은 감자만 자라
껍질 까는 게 힘들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된다

 

예쁜 꽃이 피고

 

줄기랑 잎이 주저앉을 때
수확하면 된다

 

새로 나온 감자는
바로 삶아서

 

소금을 뿌려가며
따끈한 채로 먹으면 된다

 

달콤하고 맛있다

 

혹은

 

개울가에 많이 핀
물냉이를 뜯어 와

 

다진 파, 기름, 소금

후추를 섞은 양념장과

 

삶아서 한 입 크기로 자른
감자를 섞어 감자 샐러드로

 

아침식사의 기본 메뉴다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PAIN a LA POMME DE TERRE'
일명 감자빵은

 

숙성시킨 반죽에 삶아서 으깬
감자를 섞는다

 

폭신하고 촉촉한

 

단맛이 나는
엄마의 최고 요리 중 하나였다

 

비밀이야

 

한 번 만들어 봐
절대 이렇게 안 될걸

 

아무리 궁리를 해도
폭신하게 되질 않았다

 

떡같이 돼 버렸네

 

이건 이거대로 맛있지만

 

재료나 분량도

 

완전 비밀

 

이러자

 

스무 살이 되면
가르쳐 줄게

 

치사해

 

가을에 엄마에게
편지가 왔다

 

장문의 편지로
집을 나간 변명이라든가

 

과수원을 시작하려고
한다는 얘기와

 

여러 가지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감자빵에 대한
레시피는 없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엄마의 비법은 모르는 채다

 

어느 순간
엄마와는 다른

 

나만의 감자빵 레시피가
완성되었다

 

감자는 수확하면
햇빛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며

 

그늘에서 말려

 

종이상자에 넣는다

 

보존이 잘된 감자는

 

겨울동안 소중한
식량으로 쓰인다

 

가끔 꺼내서
싹이 난 게 있으면

 

빨리 뜯어내면
봄까지 먹을 수 있다

 

즉 겨울이 끝나고
우선 할 일은

 

다음 겨울 식량을
준비하는 것

 

코모리에서 산다는 건
그런 일들의 반복이다

 

엄마의 편지

 

뭔가에 실패해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볼 때마다

 

난 항상 같은 걸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같은 장소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돌아온 것 같아서
좌절했어

 

하지만 경험을 쌓았으니

 

실패를 했든
성공을 했든

 

같은 장소를
헤맨 건 아닐 거야

 

'원'이 아니라 '나선'을
그렸다고 생각했어

 

맞은 편에서 보면
같은 곳을 도는 듯 보였겠지만

 

조금씩은 올라갔거나
내려갔을 거야

 

그런 거면 조금 낫겠지

 

아니, 그것보다도

 

인간은 '나선'
그 자체인지도 몰라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면서

 

그래도 뭔가 있을 때마다

위로도 아래로도
자랄 수 있고, 옆으로도

 

내가 그리는 '원'도
점차 크게 부풀어

 

조금씩 '나선'은
커지게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힘이 나더구나

 

처음 봤을 땐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애써서 밭농사 준비는
해 두었지만

 

올해는 감자를
심지 않기로 했다

 

내년 겨울에는
여기 없을 테니까

 

일곱 번째 요리

 

안녕하세요

 

유타 네가 웬일이니?

 

키코 있어요?

 

이치코네 밭에 갔어

 

거기 가 볼게요

 

- 어이
- 어이

 

이치코가 양파를
부탁해서

 

벌써 모종을 해놨더라고

 

혼자 먹기엔 많지 않아?

 

요리에 양파 많이 쓰는 걸
좋아했거든

 

기름 발라 오븐에 구워
산초소금 뿌려도 먹고

 

양파를 통째로 넣은
수프라든가

 

결정하자마자
떠나 버리다니

 

그러게

 

하지만 그걸로
다시 보게 됐어

 

응?

 

이치코는 좀
꾸물거리는 면이 있었잖아

 

그랬었지

 

이치코가 뭐라고 했어?

 

이대로 코모리에 있는 게
스스로 납득이 안 된다고

 

이치코는 말야

 

처음에 숨을 곳이 없어
돌아온 것 같았잖아

 

진취적인 마음으로
살 곳을 선택하고 싶댔어

 

마을에 자신이 있을 곳을
만들겠다고

 

아니면 코모리에
실례되는 것 같다고 했어

 

음...

 

나한테도 같은 말을
했었는데

 

걘 정말 자존심 강하고
지기 싫어하고

 

생각이 많고
융통성이 없어

 

여기가 좋으면
그냥 살면 될 것을

 

돌아서 가는 것도 괜찮아

 

박복한 공주님
놀이 중인 거야

 

너무 엄격한데

 

양파는 모종심기부터
시작된다

 

가을 초입에 씨를 뿌리고
흙을 잘 덮어준 다음

 

건조와 비를 피해
멍석을 덮어 5일 정도 두고

 

싹이 나면 멍석을 걷고

 

7, 8밀리 두께가
될 때까지 키운 후

 

비료를 준 밭에
옮겨 심는다

 

그대로 겨울을 넘긴다

 

눈이 녹고
따뜻해져 오면

 

꽃이 피어나는데
그건 일찍 뽑아야 한다

 

꽃이 핀 양파는

 

작고 단단해서
맛이없어

 

빨리 뽑은 양파는
작지만 먹을 수 있고

 

잎은 파처럼
사용할 수 있다

 

수확은 장마가 들기 전에
잎이 녹색일 때 해야 한다

 

잎이 시들 때까지 말렸다
처마 밑에 걸어 보관한다

 

겨울을 지나 10개월

 

손이 많이 가는 편이지

 

이치코처럼

 

밭은 할머니가
경작한 거야?

 

내가 했지

 

한 번 엉망이 되면
다시 밭으로 쓰기 힘들다고

 

할머니가 나한테
하라잖아

 

집이 바쁠 때
도와준 적은 있지만

 

내가 채소를
끝까지 기른 적이 없어서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어

 

밭을 지켜주고 있구나

 

어차피 금방 돌아올 거야
이치코는

 

5년 후

 

제1회
작은 숲속의 봄 수확제

 

- 햇감자로군요
- 햇감자예요

 

이치코

 

오랜만이에요

 

돌아왔다고 듣긴 했어

 

이치코 신랑 찾으러
나간 거지?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안녕하세요

 

키코

 

아기는 어쩌고?

 

남편이 보고 있어요

 

- 정말 귀엽네
- 고맙습니다

 

드셔 볼래요?

 

간즈키 과자잖아
어릴 때 많이 먹었는데

 

부인회에서
금방 쪄낸 거예요

 

저기 감주도 있어요

 

어릴 때 엄마가 만들어 주던
간즈키

 

형제끼리 싸움도 했는데

 

이건 호두 넣은 거
이건 들깨 넣은 거예요

 

들깨도 옛날엔
직접 농사 지었는데

 

다들 열심히
도와서 말이지

 

우리도 애 많이 낳아서
분교를 부활시킬 거예요

 

사이 좋구나

 

이치코 네 남편은?

 

교실에서 전통 무용
준비해주고 있어요

 

그런 것도 했어?

 

다들 잘 안 모여서
연습 부족이지만요

 

이치코도 나와?

 

준비해야 하니
가 볼게요

 

- 부탁드려요
- 갔다 와

 

잘해!

 

그러고 보니
어릴 때도 열심히 했었어

 

분교 없어지고 안 했지만

 

근처 사는 졸업생들한테
연락했어요

 

그래야 모일 거라고

 

다들 옛날엔 좋아했으니까요

 

이걸 계기로 몇 명이라도
돌아오면 좋겠어요

 

실례할게요

 

왜 그러니?
아가 왜 그래?

 

잘 모르겠어

 

엄마 왔네

 

배고파?

 

- 왜 울어?
- 모르겠어

 

여행길에 오르는 건
언제나                    

 

갑작스럽게                  

깜짝 놀란 얼굴로               

 

춤을 추기 시작했지             

 

울지 말라고는 못하겠어           

 

못하겠어 못하겠어             

 

어떤 곤란이라도 상관없어          

 

목소리를 높여               

 

도망치지 마                 

 

그다지 강해지진 못하더라도         

 

땅을 밟고 서는 거야             

 

물이 튀고 있어               

 

다채롭게                  

 

세상이 거꾸로 된 것처럼          

 

나에겐 보였어               

 

웃지 말라고는 못하겠어           

 

못하겠어 못하겠어             

 

돌아가는 세상은
계속 돌아가고 있어             

 

다양한 색깔의
일상 속에서                

 

멈출 때도
나아갈 때도 계속              

 

네 옆에 옆에 있을게            

 

무서워해도
분해해도                  

 

지금은 지금밖에 없어            

나아가는 거야               

 

어떤 곤란이라도
상관없어                  

 

목소리를 높여                

 

도망치지 마                

 

그다지 강해지진 못하더라도         

 

땅을 밟고 서는 거야             

 

그래, 인생은 도는 거야           

 

다양한 색깔의
일상 속에서                

 

멈출 때도
나아갈 때도 계속              

 

네 옆에 옆에 있을게            

 

무서워해도
분해해도                 

 

지금은 지금밖에 없어            

 

나아가는 거야               

 

vod 자막: 정혜영
vod 번역: 조소라

자막제공
전주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