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00:00:24,666 --> 00:00:26,333 "다음 몇 편의 TV 영화들은" 2 00:00:26,416 --> 00:00:29,958 "1978년에서 1981년 사이 채널 7에서 방영하기 위해" 3 00:00:30,041 --> 00:00:32,875 "모두 영국에서 제작 및 촬영되었습니다" 4 00:00:32,958 --> 00:00:36,375 "당시에 방영된 이후로는 방영된 바 없습니다" 5 00:00:43,750 --> 00:00:44,625 네 6 00:00:45,583 --> 00:00:48,750 여기는 제가 글을 쓰는 오두막입니다 7 00:00:50,000 --> 00:00:52,875 여기서 지낸 지 30년 됐습니다 8 00:00:52,958 --> 00:00:54,166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외 3편" 9 00:00:54,250 --> 00:00:55,916 아주 중요한 게 있는데 10 00:00:56,000 --> 00:00:59,708 시작하기 전에 필요한 건 모두 갖춰야 합니다 11 00:01:01,083 --> 00:01:05,208 담배는 물론이고 커피와 초콜릿까지요 12 00:01:06,958 --> 00:01:10,875 저는 글 쓰기 전에 반드시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 둡니다 13 00:01:12,916 --> 00:01:16,458 연필은 6자루 있어요 보드도 청소해야 합니다 14 00:01:18,666 --> 00:01:20,083 지우개 가루가 너무 많네요 15 00:01:21,833 --> 00:01:22,666 됐습니다 16 00:01:24,958 --> 00:01:26,875 그리고 드디어 시작합니다 17 00:01:30,125 --> 00:01:33,708 우선 수정할 것들을 수정하죠 18 00:01:36,458 --> 00:01:37,291 그렇지 19 00:01:42,541 --> 00:01:43,375 이건… 20 00:01:47,250 --> 00:01:51,041 헨리 슈거는 41세의 부유한 독신자였다 21 00:01:51,666 --> 00:01:54,625 지금은 세상을 뜬 아버지가 부자였기에 부유했고 22 00:01:54,708 --> 00:01:58,791 이기적인 사람이라 재산을 아내와 나누기 싫어 독신이었다 23 00:01:58,875 --> 00:02:03,291 키는 188cm이고 본인 생각만큼 잘생기진 않았다 24 00:02:03,375 --> 00:02:05,958 옷차림에 신경을 많이 써서 25 00:02:06,041 --> 00:02:08,250 비싼 양복점에서 정장을 맞추고 26 00:02:08,333 --> 00:02:11,666 셔츠도, 구두도 비싼 곳에서 맞췄다 27 00:02:11,750 --> 00:02:14,583 머리는 열흘에 한 번 다듬었는데 28 00:02:14,666 --> 00:02:17,458 그때마다 손톱 손질도 같이 받았다 29 00:02:17,541 --> 00:02:19,083 그가 몰던 페라리 자동차는 30 00:02:19,166 --> 00:02:21,666 시골 집 한 채와 맞먹는 가격이었다 31 00:02:23,291 --> 00:02:27,000 친구들도 모두 부자였고 평생 단 하루도 일해본 적 없었다 32 00:02:28,000 --> 00:02:32,500 바다에 떠다니는 해초마냥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타입으로 33 00:02:32,583 --> 00:02:36,291 딱히 나쁜 사람도 그렇다고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34 00:02:37,458 --> 00:02:39,416 인테리어 소품 같았달까 35 00:02:41,375 --> 00:02:43,625 헨리와 같은 부자들에게는 36 00:02:43,708 --> 00:02:45,750 공통점이 있다 37 00:02:45,833 --> 00:02:47,875 더 부유해지겠다는 강한 욕망 38 00:02:48,791 --> 00:02:51,625 천만으로도 2천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39 00:02:51,708 --> 00:02:54,583 돈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40 00:02:54,666 --> 00:02:58,250 어느 날 갑자기 빈털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산다 41 00:02:58,333 --> 00:03:01,583 재산을 불리는 방식도 참 다양하다 42 00:03:01,666 --> 00:03:04,333 주식을 사놓고 등락을 지켜보기도 하고 43 00:03:04,416 --> 00:03:06,875 토지, 미술품 다이아몬드에 투자하거나 44 00:03:06,958 --> 00:03:09,333 룰렛, 블랙잭, 경마도 하고 45 00:03:09,416 --> 00:03:11,416 도박이라면 뭐든지 하기도 한다 46 00:03:11,500 --> 00:03:15,541 헨리 슈거도 그런 유였는데 속임수도 불사했다 47 00:03:16,500 --> 00:03:17,458 어느 여름의 주말 48 00:03:17,541 --> 00:03:21,166 헨리는 런던에서 차를 몰고 윌리엄 W. 경의 집으로 갔다 49 00:03:21,250 --> 00:03:23,583 저택은 웅장했고 주변 경관은 아름다웠지만 50 00:03:23,666 --> 00:03:27,166 헨리가 도착한 토요일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51 00:03:27,250 --> 00:03:30,458 집주인과 다른 손님들은 게임을 하며 오후를 보내는데 52 00:03:30,541 --> 00:03:34,708 헨리는 우울한 얼굴로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만 바라봤다 53 00:03:34,791 --> 00:03:37,416 헨리는 응접실에서 나와 현관 홀에 들어섰다 54 00:03:38,125 --> 00:03:42,375 정처 없이 집 안을 걷다가 서재로 들어가게 됐다 55 00:03:45,250 --> 00:03:48,916 윌리엄의 부친은 책 수집가였고 그 큰 방의 모든 벽면엔 56 00:03:49,000 --> 00:03:52,291 바닥에서 천장까지 온통 가죽 장정본 책들이 꽂혀 있었다 57 00:03:52,375 --> 00:03:53,708 별 흥미가 생기진 않았다 58 00:03:53,791 --> 00:03:57,166 탐정 소설이나 스릴러만 읽는데 그런 책은 없었으니까 59 00:03:57,250 --> 00:03:58,708 방을 나서려는데 60 00:03:58,791 --> 00:04:01,875 굉장히 색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61 00:04:01,958 --> 00:04:03,458 워낙 두께가 얇아 62 00:04:03,541 --> 00:04:06,541 양옆의 책들보다 튀어나와 있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63 00:04:06,625 --> 00:04:08,166 책을 뽑아 들었다 64 00:04:08,250 --> 00:04:12,166 두꺼운 종이로 표지를 만든 애들 연습장 같았다 65 00:04:12,250 --> 00:04:14,833 짙은 푸른색 색상 표지엔 아무것도 안 적혀 있었다 66 00:04:14,916 --> 00:04:18,750 첫 페이지에 검은 잉크로 정갈하게 쓰여 있는 내용은 67 00:04:18,833 --> 00:04:19,958 "임다드 칸에 대한 보고" 68 00:04:20,041 --> 00:04:21,958 "눈 없이도 볼 수 있는 자 Z.Z. 차터지" 69 00:04:22,041 --> 00:04:23,958 이상하군, 요상해 70 00:04:24,625 --> 00:04:25,541 이게 뭐지? 71 00:04:26,291 --> 00:04:29,750 팔걸이 의자에 앉아 처음부터 읽어 내려갔다 72 00:04:29,833 --> 00:04:32,875 헨리가 그 얇은 연습장에서 읽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73 00:04:37,958 --> 00:04:41,916 내 이름은 Z.Z. 차터지 캘커타 병원 외과 과장이다 74 00:04:42,000 --> 00:04:44,083 1935년 12월 2일 오전 75 00:04:44,166 --> 00:04:46,291 나는 의사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76 00:04:46,375 --> 00:04:49,916 다른 의사 3명과 함께였다 마셜, 미트라, 맥팔레인 77 00:04:50,000 --> 00:04:51,500 노크 소리가 들렸다 78 00:04:51,583 --> 00:04:52,750 '들어와요' 내가 말했다 79 00:04:54,458 --> 00:04:57,750 실례합니다만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80 00:04:57,833 --> 00:04:59,500 '여긴 전용 공간입니다' 내가 말했다 81 00:04:59,583 --> 00:05:01,750 네, 압니다 불쑥 나타나 죄송합니다만 82 00:05:01,833 --> 00:05:04,791 아주 흥미로운 것을 보여드릴까 합니다 83 00:05:04,875 --> 00:05:07,208 우리 모두 짜증 나서 대꾸하지 않았다 84 00:05:08,208 --> 00:05:12,375 여러분, 저는 눈 없이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85 00:05:13,208 --> 00:05:15,625 60대에 왜소한 체격 흰 콧수염을 길렀고 86 00:05:15,708 --> 00:05:18,375 희한하게 검은 털들이 귀에서 자라나 있었다 87 00:05:18,458 --> 00:05:21,291 붕대 50개쯤을 들여서 제 얼굴을 감싸셔도 88 00:05:21,375 --> 00:05:23,500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89 00:05:23,583 --> 00:05:27,166 너무 진지한 말투였고 내 안에서 호기심이 일어났다 90 00:05:27,250 --> 00:05:28,250 들어오시죠 91 00:05:35,166 --> 00:05:36,333 좋습니다 92 00:05:37,333 --> 00:05:38,791 마셜 선생이 펼친 손가락 개수는? 93 00:05:38,875 --> 00:05:40,291 - 7개요 - '한 번 더' 내가 말했다 94 00:05:40,375 --> 00:05:41,750 - 9개 - '한 번 더' 내가 말했다 95 00:05:41,833 --> 00:05:42,833 - 3개 - 한 번 더 96 00:05:42,916 --> 00:05:44,291 - 또 3개네요 - 한 번 더 97 00:05:45,250 --> 00:05:46,166 손가락이 없군요 98 00:05:48,458 --> 00:05:49,333 무슨 수를 쓴 거죠? 99 00:05:49,416 --> 00:05:53,333 수를 쓴 게 아니라 오랜 훈련으로 얻은 능력입니다 100 00:05:53,416 --> 00:05:54,708 어떤 훈련이죠? 101 00:05:54,791 --> 00:05:57,208 죄송합니다만 그건 공개할 수 없습니다 102 00:05:58,125 --> 00:05:59,291 뭘 해드리면 되죠? 103 00:05:59,375 --> 00:06:02,333 제가 속해 있는 유랑극단이 오늘 캘커타에 도착했고 104 00:06:02,416 --> 00:06:05,791 오늘 밤 로열팰리스 홀에서 첫 공연이 있습니다 105 00:06:05,875 --> 00:06:07,375 제 공연의 제목은 106 00:06:07,458 --> 00:06:09,708 '임다드 칸, 눈 없이도 볼 수 없는 자'입니다 107 00:06:09,791 --> 00:06:11,750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108 00:06:11,833 --> 00:06:13,250 저는 제일 큰 병원에 가서 109 00:06:13,333 --> 00:06:16,791 최대한 철저하고 전문적인 방식으로 눈을 가려주십사 하죠 110 00:06:16,875 --> 00:06:19,125 의사 선생님들께서 해주시지 않으면 111 00:06:19,208 --> 00:06:21,208 사람들이 속임수라고 생각하거든요 112 00:06:21,291 --> 00:06:24,041 그다음엔 거리로 나가 위험한 일을 합니다 113 00:06:24,125 --> 00:06:25,333 동료 의사들을 돌아봤는데 114 00:06:25,416 --> 00:06:28,458 미트라와 맥팔레인은 진료가 있었다, 가봐요 115 00:06:28,541 --> 00:06:31,541 - 마셜 선생은… - 좋아요, 제대로 해봅시다 116 00:06:31,625 --> 00:06:33,708 아무것도 안 보이게 확실히 가려보자고 117 00:06:33,791 --> 00:06:36,208 정말 친절하시군요 원하시는 대로 해주십시오 118 00:06:36,291 --> 00:06:38,000 '붕대를 감기 전에' 내가 말했다 119 00:06:38,083 --> 00:06:40,250 '부드러우면서 밀도 높은 걸 눈에 얹는 게 좋겠어' 120 00:06:40,333 --> 00:06:42,500 - 밀가루 반죽? - 좋아, 제과점에 가봐 121 00:06:42,583 --> 00:06:44,375 난 수술실로 모셔가서 눈꺼풀을 봉할게 122 00:06:44,458 --> 00:06:46,916 나는 임다드를 데리고 긴 복도를 지나 수술실로 갔다 123 00:06:47,000 --> 00:06:48,250 '누우시죠' 내가 말했다 124 00:06:48,333 --> 00:06:50,666 나는 선반에서 콜로듐 병을 꺼냈다 125 00:06:50,750 --> 00:06:52,916 이걸로 눈꺼풀을 붙여드리겠습니다 126 00:06:53,000 --> 00:06:54,291 나중에 어떻게 떼죠? 127 00:06:54,375 --> 00:06:57,833 속눈썹 아래에 조심스럽게 알코올을 묻히면 됩니다 128 00:06:57,916 --> 00:07:00,583 마를 때까지 눈을 감고 계세요 129 00:07:00,666 --> 00:07:01,625 2분 후 130 00:07:01,708 --> 00:07:04,041 '눈을 떠보세요' 내가 말했다 당연히 뜨지 못했다 131 00:07:04,125 --> 00:07:08,000 마셜이 가져온 반죽으로 임다드의 한쪽 눈을 덮었다 132 00:07:08,083 --> 00:07:09,333 눈 전체를 덮되 133 00:07:09,416 --> 00:07:12,000 반죽이 눈 주면 피부까지 닿도록 했다 134 00:07:12,083 --> 00:07:13,791 다른 쪽 눈에도 똑같이 했다 135 00:07:13,875 --> 00:07:15,583 반죽 가장자리를 세게 눌렀다 136 00:07:15,666 --> 00:07:17,166 '불편하진 않으세요?' 내가 물었다 137 00:07:17,250 --> 00:07:18,416 전혀요, 감사합니다 138 00:07:18,500 --> 00:07:20,291 '붕대 좀 감아줘' 마셜에게 말했다 139 00:07:20,375 --> 00:07:22,000 손이 끈적거려서 140 00:07:22,083 --> 00:07:24,833 그러지, 우선 이것부터 놓고 141 00:07:24,916 --> 00:07:28,333 마셜이 반죽으로 덮은 눈 위에 물 적신 솜을 얹었다 142 00:07:28,416 --> 00:07:29,375 제대로 붙었다 143 00:07:29,458 --> 00:07:30,416 일어나 주세요 144 00:07:31,125 --> 00:07:34,416 마셜이 7.5cm 너비의 붕대로 얼굴과 머리를 감았다 145 00:07:34,500 --> 00:07:36,833 숨 쉬어야 하니 코는 막지 말아주세요 146 00:07:36,916 --> 00:07:37,750 물론이죠 147 00:07:38,750 --> 00:07:41,500 꽉 맞는 부분은 좀 낄 수도 있어요 148 00:07:44,166 --> 00:07:45,166 어때? 149 00:07:45,250 --> 00:07:46,250 '훌륭하군' 내가 말했다 150 00:07:46,333 --> 00:07:48,708 엄청난 뇌수술을 받은 환자 같았다 151 00:07:48,791 --> 00:07:49,666 어떠신가요? 152 00:07:49,750 --> 00:07:50,833 아주 좋네요 153 00:07:50,916 --> 00:07:53,916 이렇게 꼼꼼하게 해주시다니 정말 훌륭하십니다 154 00:07:54,000 --> 00:07:57,166 임다드 칸은 침대에서 일어나 곧장 문을 향해 갔다 155 00:08:04,291 --> 00:08:05,958 맙소사! 봤어? 156 00:08:06,041 --> 00:08:07,458 문고리를 단번에 잡았다 157 00:08:07,541 --> 00:08:08,958 마셜 입가의 웃음이 사라졌다 158 00:08:09,541 --> 00:08:12,583 임다드는 정상적인 자세로 빠르게 복도를 걸어갔다 159 00:08:12,666 --> 00:08:16,000 우린 5m쯤 뒤에서 따라갔는데 왠지 섬뜩했다 160 00:08:16,083 --> 00:08:19,000 붕대 감은 거대한 머리로 저렇게 경쾌하게 걷다니 161 00:08:19,083 --> 00:08:20,166 '저걸 봤어!' 내가 소리쳤다 162 00:08:20,250 --> 00:08:22,875 '저 트롤리를 본 거야 굉장하군' 163 00:08:22,958 --> 00:08:24,333 마셜은 대답이 없었다 164 00:08:24,416 --> 00:08:26,500 충격으로 굳은 얼굴이었다 165 00:08:27,250 --> 00:08:29,708 임다드는 계단도 거침없이 내려갔다 166 00:08:29,791 --> 00:08:31,208 난간조차 잡지 않았다 167 00:08:31,291 --> 00:08:34,166 계단에서 마주친 몇 사람은 저런 반응을 보였다 168 00:08:34,875 --> 00:08:38,125 계단을 다 내려가서는 정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169 00:08:38,833 --> 00:08:41,166 마셜과 나는 그 뒤를 바짝 쫓았다 170 00:08:41,250 --> 00:08:44,583 출입문 밖에는 100명쯤 되는 맨발의 아이들이 소릴 지르며 171 00:08:44,666 --> 00:08:46,166 하얀 머리통의 남자에게 몰려들었다 172 00:08:46,250 --> 00:08:48,500 남자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인사하고 173 00:08:48,583 --> 00:08:51,833 곧장 자전거 쪽으로 가 타더니 페달을 밟아 8자 모양을 그렸다 174 00:08:51,916 --> 00:08:54,708 맨발의 아이들은 환호하고 웃으며 그를 따라갔다 175 00:08:54,791 --> 00:08:57,583 그는 속도를 올려 혼잡한 도로로 들어갔고 176 00:08:57,666 --> 00:09:00,916 차들은 빵빵대며 자전거 주위를 쌩쌩 달렸다 177 00:09:01,000 --> 00:09:02,625 자전거 실력이 대단했다 178 00:09:02,708 --> 00:09:04,708 그렇게 잠시 시야에 머물다가 179 00:09:04,791 --> 00:09:06,750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180 00:09:06,833 --> 00:09:08,708 '믿을 수가 없군' 마셜이 말했다 181 00:09:08,791 --> 00:09:10,375 믿을 수가 없군 182 00:09:10,458 --> 00:09:11,958 '나도 그래' 내가 말했다 183 00:09:12,041 --> 00:09:14,250 우리 방금 기적을 본 것 같아 184 00:09:14,333 --> 00:09:16,875 그 후 온종일 바쁘게 진료하고 185 00:09:16,958 --> 00:09:19,541 오후 6시에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186 00:09:19,625 --> 00:09:21,000 찬물로 오래 샤워하고 187 00:09:21,083 --> 00:09:24,500 허리에 수건 하나 두른 채 베란다에서 위스키 소다를 마셨다 188 00:09:24,583 --> 00:09:27,500 그리고 7시 10분 전 로열팰리스 홀에 도착했다 189 00:09:27,583 --> 00:09:29,000 공연은 2시간 동안 계속됐다 190 00:09:29,083 --> 00:09:30,791 놀랍게도 재미있었다 191 00:09:30,875 --> 00:09:32,458 저글링, 뱀 공연, 불 쇼 192 00:09:32,541 --> 00:09:35,666 양날칼을 위장까지 집어넣는 칼 쇼까지 193 00:09:35,750 --> 00:09:37,458 마지막으로 트럼펫 팡파르와 함께 194 00:09:37,541 --> 00:09:40,000 우리 친구 임다드 칸이 무대에 올랐다 195 00:09:40,083 --> 00:09:42,291 관중 몇이 무대에 올라가 안대를 씌우자 196 00:09:42,375 --> 00:09:45,041 임다드는 어린 소년의 몸 주위로 칼을 던지고 197 00:09:45,125 --> 00:09:47,541 머리 위의 깡통을 총으로 쏘아 맞혔다 198 00:09:47,625 --> 00:09:51,458 그리고 마침내 붕대를 감은 머리에 금속 드럼통이 씌워졌다 199 00:09:51,541 --> 00:09:55,291 소년이 임다드의 양손에 바늘과 실을 각각 쥐여줬다 200 00:09:55,375 --> 00:09:57,708 그리고 커다란 돋보기를 그 손 앞에 갖다 댔다 201 00:09:57,791 --> 00:09:59,375 한 번의 실수도 없이 202 00:09:59,458 --> 00:10:02,125 깔끔하게 바늘에 실을 꿰었다 203 00:10:07,208 --> 00:10:08,208 놀랄 '노'자였다 204 00:10:10,583 --> 00:10:13,125 무대 뒤로 가 보니 임다드가 스툴에 조용히 앉아 205 00:10:13,208 --> 00:10:14,625 분장을 지우고 있었다 206 00:10:14,708 --> 00:10:16,416 궁금해서 오셨군요 207 00:10:16,500 --> 00:10:17,666 '너무 궁금하네요' 내가 말했다 208 00:10:17,750 --> 00:10:21,583 귀에서 자라난 검은 털에 다시 한번 놀랐다 209 00:10:21,666 --> 00:10:23,916 그런 귀는 본 적이 없었다 210 00:10:24,000 --> 00:10:26,458 제안할 게 있습니다 제가 전문 작가는 아닙니다만 211 00:10:26,541 --> 00:10:30,083 눈 없이 보는 능력을 갖게 된 경위를 말씀해 주시면 212 00:10:30,166 --> 00:10:31,833 그대로 받아적어서 213 00:10:31,916 --> 00:10:34,833 '브리티시 메디컬 저널'에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214 00:10:34,916 --> 00:10:36,125 유명 잡지도 가능하겠죠 215 00:10:36,208 --> 00:10:38,375 그러면 유명해지는 데에 도움이 될까요? 216 00:10:38,458 --> 00:10:40,416 - 큰 도움이 될 겁니다 - 잘됐네요 217 00:10:40,500 --> 00:10:43,333 환자들 병력을 기록할 때 쓰는 나만의 속기법으로 218 00:10:43,416 --> 00:10:46,500 그날 밤 임다드 칸이 해준 모든 이야기를 받아적었다 219 00:10:46,583 --> 00:10:48,750 그가 말한 그대로 여러분께 전하려 한다 220 00:10:50,041 --> 00:10:52,208 "그날 밤 임다드 칸이 내게 해준 모든 이야기" 221 00:10:52,291 --> 00:10:53,541 "(토씨 하나까지 같음)" 222 00:10:55,708 --> 00:10:58,791 나는 1873년 카슈미르에서 태어났습니다 223 00:10:58,875 --> 00:11:01,916 아버지는 국유 철도회사의 검표원이셨지요 224 00:11:02,000 --> 00:11:05,291 어느 날, 학교에서 마술 공연을 봤습니다 225 00:11:05,375 --> 00:11:06,833 넋 놓고 봤어요 226 00:11:06,916 --> 00:11:08,833 2주 후, 저축한 돈을 모두 들고 227 00:11:08,916 --> 00:11:11,375 집을 나와 유랑극단에 들어갔습니다 228 00:11:11,458 --> 00:11:14,708 1886년, 13세 때의 일입니다 229 00:11:14,791 --> 00:11:15,791 3년 동안 230 00:11:15,875 --> 00:11:18,500 극단과 함께 펀자브 전역을 돌았습니다 231 00:11:18,583 --> 00:11:21,125 그즈음엔 극단에서 가장 인기가 많아졌죠 232 00:11:21,208 --> 00:11:23,666 버는 돈은 줄곧 저축했고 233 00:11:23,750 --> 00:11:27,541 그 액수가 3천 루피도 넘었습니다 234 00:11:27,625 --> 00:11:29,333 그때쯤, 소문을 들었는데 235 00:11:29,416 --> 00:11:32,958 한 유명한 요가 수행자가 공중부양 능력을 얻었다더군요 236 00:11:33,041 --> 00:11:34,666 그 수행자가 기도할 때면 237 00:11:34,750 --> 00:11:39,125 바닥에서 최소 45cm 이상 몸 전체가 떠오른다는 겁니다 238 00:11:39,208 --> 00:11:40,291 강렬한 인상을 받았죠 239 00:11:41,375 --> 00:11:42,208 콧수염은? 240 00:11:44,666 --> 00:11:46,000 유랑극단을 나와서 241 00:11:46,083 --> 00:11:49,375 갠지스강 유역의 작은 마을로 갔습니다 242 00:11:49,458 --> 00:11:51,375 그 수행자가 거기에 산다더군요 243 00:11:51,458 --> 00:11:54,333 어느 날, 그리 멀지 않은 깊은 정글에 혼자 사는 244 00:11:54,416 --> 00:11:57,583 어떤 은둔자를 만났다는 여행자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245 00:11:57,666 --> 00:11:58,958 그거면 충분했죠 246 00:11:59,041 --> 00:12:01,166 마차를 빌리려고 당장 뛰쳐나갔습니다 247 00:12:02,083 --> 00:12:03,708 마부와 흥정하는데 248 00:12:03,791 --> 00:12:06,291 한 남자가 다가와서는 자기도 그쪽으로 간다며 249 00:12:06,375 --> 00:12:09,291 마차를 같이 타고 돈을 나눠 내자는 겁니다 250 00:12:09,375 --> 00:12:12,166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요? 251 00:12:12,250 --> 00:12:13,541 얘길 나누다 보니 252 00:12:13,625 --> 00:12:16,625 바로 그 위대한 요가 수행자의 제자였고 253 00:12:16,708 --> 00:12:19,541 스승을 만나러 가던 길에 절 만난 거였습니다 254 00:12:19,625 --> 00:12:20,458 불쑥 소리쳤죠 255 00:12:20,541 --> 00:12:23,416 '내가 찾는 사람입니다! 만날 수 있을까요?' 256 00:12:23,500 --> 00:12:26,291 동행자가 저를 가만히 보더니 257 00:12:26,375 --> 00:12:28,458 그건 안 된다고 하더군요 258 00:12:28,541 --> 00:12:31,750 그 이후로 뭘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259 00:12:31,833 --> 00:12:34,416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아냈죠 260 00:12:34,500 --> 00:12:37,625 수행자가 명상을 시작하는 시간을요 261 00:12:37,708 --> 00:12:41,958 동행자는 마차를 세우더니 내려서 가버렸습니다 262 00:12:42,041 --> 00:12:44,625 저는 계속 가는 척하다가 모퉁이를 돌자마자 263 00:12:44,708 --> 00:12:46,875 마차에서 내려 길을 되짚어갔습니다 264 00:12:46,958 --> 00:12:49,750 남자는 정글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죠 265 00:12:49,833 --> 00:12:51,750 덤불 속에서 소리가 나더군요 266 00:12:51,833 --> 00:12:54,125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호랑이겠군' 생각했죠 267 00:12:54,208 --> 00:12:56,750 '곧 달려들어 날 물어뜯겠지' 268 00:12:56,833 --> 00:12:59,583 '갈기갈기 뜯겨 잡아먹히고 말 거야' 269 00:13:00,958 --> 00:13:01,833 그 사람이었습니다 270 00:13:04,125 --> 00:13:07,583 그 사람이 걸어가는 경로엔 길이라곤 없었습니다 271 00:13:07,666 --> 00:13:11,791 커다란 대나무와 무성한 풀들을 헤치고 나아갔죠 272 00:13:11,875 --> 00:13:15,833 저는 100m쯤 뒤에서 숨죽인 채 따라갔습니다 273 00:13:15,916 --> 00:13:18,916 시야에서 놓치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274 00:13:19,000 --> 00:13:21,458 그럴 때면 발소리를 듣고 따라갔습니다 275 00:13:21,541 --> 00:13:24,750 이 따라잡기 게임은 30분쯤 지속됐는데 276 00:13:24,833 --> 00:13:27,666 갑자기 발소리가 뚝 끊겨버렸습니다 277 00:13:27,750 --> 00:13:29,625 멈춰 서서 귀 기울였죠 278 00:13:29,708 --> 00:13:31,583 그 순간 무성한 덤불 사이로 279 00:13:31,666 --> 00:13:34,166 좁은 공터와 작은 움막 2채가 보였습니다 280 00:13:34,250 --> 00:13:35,458 두근거렸죠 281 00:13:35,541 --> 00:13:37,833 가까운 움막 옆엔 물웅덩이가 있고 282 00:13:37,916 --> 00:13:39,916 그 옆엔 기도용 매트가 그리고 뒤쪽으로는 283 00:13:40,000 --> 00:13:44,208 잎이 무성한 아름댭고 커다란 바오바브나무가 있었죠 284 00:13:44,291 --> 00:13:46,583 정오의 열기를 견디며 기다렸습니다 285 00:13:46,666 --> 00:13:49,500 습기 가득한 오후의 무거운 열기도 버텨냈죠 286 00:13:49,583 --> 00:13:50,958 5시가 되어 갈 때 287 00:13:51,041 --> 00:13:54,416 조용히 나무에 올라가 무성한 잎 사이에 숨었습니다 288 00:13:54,500 --> 00:13:56,625 마침내 수행자가 움막에서 나와 289 00:13:56,708 --> 00:13:58,541 매트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습니다 290 00:13:58,625 --> 00:14:01,208 움직임 하나하나가 조용하고 부드러웠죠 291 00:14:01,291 --> 00:14:03,791 무릎에 손바닥을 대고 앉아 292 00:14:03,875 --> 00:14:06,041 코로 긴 숨을 내뱉었는데 293 00:14:06,125 --> 00:14:09,875 제 눈에는 이미 수행자의 몸을 감싸는 빛이 보였습니다 294 00:14:09,958 --> 00:14:13,291 그 자세로 14분 동안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죠 295 00:14:13,375 --> 00:14:17,000 그리고 제 이 두 눈으로 분명히 봤습니다 296 00:14:17,083 --> 00:14:19,166 그의 몸이 천천히 바닥에서 떠올랐죠 297 00:14:20,666 --> 00:14:24,333 30cm, 40cm, 45cm, 50cm 298 00:14:25,083 --> 00:14:27,166 매트로부터 60cm 299 00:14:27,250 --> 00:14:28,958 나무 위에서 혼잣말을 했죠 300 00:14:29,041 --> 00:14:32,125 '내 눈앞에 공중부양하는 사람이 있어' 301 00:14:33,458 --> 00:14:37,416 제 시계로 재보니 46분 동안 공중부양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302 00:14:37,500 --> 00:14:39,708 그러더니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가 303 00:14:39,791 --> 00:14:42,333 엉덩이가 다시 매트에 닿았습니다 304 00:14:42,416 --> 00:14:44,916 전 나무에서 내려가 곧장 달려갔죠 305 00:14:45,000 --> 00:14:47,291 수행자는 손발을 씻고 있었습니다 306 00:14:47,375 --> 00:14:49,583 '언제부터 거기 있었지?' 수행자가 쏘아붙였습니다 307 00:14:49,666 --> 00:14:52,208 그러더니 벽돌을 집어 제 쪽으로 세게 던졌고 308 00:14:52,291 --> 00:14:54,791 제 정강이에 맞은 벽돌은 둘로 쪼개졌습니다 309 00:14:54,875 --> 00:14:57,000 흉터도 있으니 보여드리죠 310 00:14:59,916 --> 00:15:01,708 그런데 그게 행운이었어요 311 00:15:01,791 --> 00:15:04,791 수행자는 이성을 잃고 벽돌을 날려선 안 되니까요 312 00:15:04,875 --> 00:15:09,250 굴욕과 후회 속에 자신에게 크게 실망한 수행자는 313 00:15:09,333 --> 00:15:12,625 저를 제자로 받아줄 수는 없지만 314 00:15:12,708 --> 00:15:15,541 절 공격한 데 대한 사죄의 의미로 315 00:15:15,625 --> 00:15:17,708 비공식적인 가르침을 주겠다더군요 316 00:15:17,791 --> 00:15:20,125 공격당할 만한 짓을 했는데요 317 00:15:20,208 --> 00:15:22,041 때는 1890년 318 00:15:22,125 --> 00:15:24,041 17세가 되기 조금 전이었습니다 319 00:15:26,000 --> 00:15:28,250 수행자는 어떤 가르침을 주었냐고요? 320 00:15:28,333 --> 00:15:29,875 바로 이겁니다 321 00:15:29,958 --> 00:15:34,541 정신이란 아주 복잡한 것이다 동시에 수천 가지를 생각하지 322 00:15:34,625 --> 00:15:37,250 주변에서 보이는 것들 소리들, 냄새들 323 00:15:37,333 --> 00:15:40,208 생각나는 것들 생각 안 하려 애쓰는 것들 324 00:15:40,291 --> 00:15:42,583 정신을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돼 325 00:15:42,666 --> 00:15:45,916 딱 한 가지, 오직 한 가지만 눈앞에 그리는 거지 326 00:15:46,000 --> 00:15:50,458 노력하면 원하는 한 가지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게 될 수도 있다 327 00:15:50,541 --> 00:15:52,458 약 3분 30초 정도 328 00:15:52,541 --> 00:15:55,625 매일 열심히 수행한다면 20년쯤 걸릴 것이다 329 00:15:55,708 --> 00:15:57,291 '20년이요?' 제가 외쳤죠 330 00:15:57,375 --> 00:15:59,083 그래, 더 걸릴 수도 있어 331 00:15:59,166 --> 00:16:01,875 보통 20년쯤 걸리지 성공 못 할 수도 있고 332 00:16:01,958 --> 00:16:03,541 그때쯤이면 늙었을 텐데요 333 00:16:03,625 --> 00:16:06,416 걸리는 시간은 다 달라 10년일 수도, 30년일 수도 334 00:16:06,500 --> 00:16:08,208 아주 드문 경우지만 335 00:16:08,291 --> 00:16:12,250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1, 2년 안에 성공하기도 하는데 336 00:16:12,333 --> 00:16:14,250 십억 명 중 한 명이고 넌 아니야 337 00:16:14,333 --> 00:16:16,625 정신을 집중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 338 00:16:16,708 --> 00:16:19,458 불가능에 가깝지, 해보겠나? 339 00:16:19,541 --> 00:16:21,166 눈 감고 뭔가 생각해 봐 340 00:16:21,250 --> 00:16:24,291 하나의 사물을 생각하고 눈앞에 형상을 그리는 거야 341 00:16:24,375 --> 00:16:27,750 몇 초 후면 집중이 흐트러져서 다른 생각들이 튀어나오지 342 00:16:27,833 --> 00:16:29,541 아주 어려운 일이야 343 00:16:29,625 --> 00:16:31,625 위대하고 현명한 수행자는 이렇게 말하였노라 344 00:16:33,708 --> 00:16:36,500 그렇게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345 00:16:37,083 --> 00:16:39,500 매일 저녁 눈을 감고 앉아 346 00:16:39,583 --> 00:16:41,916 가장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떠올렸지요 347 00:16:42,000 --> 00:16:45,333 열 살 때 혈액 질환으로 사망한 제 형입니다 348 00:16:45,416 --> 00:16:49,208 형의 얼굴에 집중하다가 정신이 흐트러지는 즉시 349 00:16:49,291 --> 00:16:53,458 수련을 멈추고 몇 분간 휴식한 후 다시 시작했습니다 350 00:16:53,541 --> 00:16:55,291 5년간 매일 수련한 결과 351 00:16:55,375 --> 00:16:58,208 형의 얼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352 00:16:58,291 --> 00:16:59,750 1분 30초가 되었습니다 353 00:16:59,833 --> 00:17:01,166 진전이 있었죠 354 00:17:04,791 --> 00:17:08,833 그즈음, 마술 공연으로 꽤 큰 돈을 벌기 시작했죠 355 00:17:08,916 --> 00:17:11,041 훌륭한 손재주를 타고났거든요 356 00:17:11,125 --> 00:17:13,708 그래도 수련은 계속했습니다 357 00:17:13,791 --> 00:17:17,583 어디에 있든 매일 저녁이면 조용한 곳에 앉아 358 00:17:17,666 --> 00:17:20,333 형의 얼굴에 정신을 집중했죠 359 00:17:20,416 --> 00:17:23,583 때로는 촛불을 켜고 불꽃을 들여다봤습니다 360 00:17:23,666 --> 00:17:27,041 아시겠지만 촛불은 3개의 부분으로 나뉘죠 361 00:17:27,125 --> 00:17:29,541 위쪽의 노란 불꽃 중간의 연보라색 불꽃 362 00:17:29,625 --> 00:17:30,875 그리고 안쪽의 검은 부분 363 00:17:30,958 --> 00:17:35,458 얼굴에서 40cm 거리 정확히 눈높이에 촛불을 뒀습니다 364 00:17:35,541 --> 00:17:38,458 눈을 위아래로 움직이느라 눈 근육을 움직이는 일조차 365 00:17:38,541 --> 00:17:39,916 피하기 위해서였죠 366 00:17:40,000 --> 00:17:44,041 검은 부분을 노려보다 보면 주변 모든 게 사라지는데 367 00:17:44,125 --> 00:17:48,000 그때 눈을 감고 형의 얼굴에 집중했습니다 368 00:17:48,916 --> 00:17:52,041 1907년, 34세에는 369 00:17:52,125 --> 00:17:56,125 정신이 흐트러지는 일 없이 3분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370 00:17:56,208 --> 00:17:59,458 그리고 그때쯤 제게 어떤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371 00:17:59,541 --> 00:18:01,291 뭔가 묘한 느낌이었는데 372 00:18:01,375 --> 00:18:04,375 눈을 감고 강렬한 의지를 불태우며 373 00:18:04,458 --> 00:18:05,750 뭔가를 열심히 쳐다보면 374 00:18:05,833 --> 00:18:08,541 보고 있는 대상의 윤곽이 보였습니다 375 00:18:08,625 --> 00:18:10,583 그 수행자의 말이 생각나더군요 376 00:18:10,666 --> 00:18:14,250 '어떤 신성한 이들은 집중력이 극도로 발달한 나머지' 377 00:18:14,333 --> 00:18:16,333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다고 하더라' 378 00:18:17,083 --> 00:18:21,416 매일 밤, 촛불 수련을 마친 후 379 00:18:21,500 --> 00:18:24,333 커피를 한 잔 마신 다음 눈을 가리고 380 00:18:24,416 --> 00:18:26,875 의자에 앉아 눈을 쓰지 않고 보는 연습을 했습니다 381 00:18:26,958 --> 00:18:29,125 카드 한 벌로 시작했죠 382 00:18:29,208 --> 00:18:31,333 카드 뒷면을 보며 숫자를 추측하는 건데 383 00:18:31,416 --> 00:18:33,583 처음부터 성공률은 60%나 됐습니다 384 00:18:33,666 --> 00:18:37,625 그 후에는 지도와 항법표를 사다가 벽 여기저기에 붙였습니다 385 00:18:37,708 --> 00:18:42,083 눈을 가린 채 몇 시간 동안 작은 글씨들을 읽으려 애썼죠 386 00:18:42,166 --> 00:18:46,291 그렇게 8년 동안 매일 같은 훈련을 했습니다 387 00:18:46,375 --> 00:18:49,000 1915년이 됐을 땐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388 00:18:49,083 --> 00:18:50,958 눈을 가린 채 읽을 수 있게 됐죠 389 00:18:51,041 --> 00:18:52,291 해낸 겁니다! 390 00:18:52,375 --> 00:18:54,291 마침내 능력이 생겼어요 391 00:18:55,833 --> 00:18:58,541 아시다시피 그 능력으로 마술 공연을 하게 됐는데 392 00:18:58,625 --> 00:19:01,791 관중은 좋아하긴 해도 믿진 않았죠, 지금까지도요 393 00:19:01,875 --> 00:19:05,333 선생님처럼 직접 꼼꼼하게 제 눈을 가려준 의사들조차 394 00:19:05,416 --> 00:19:08,375 눈 없이 앞을 본다는 걸 믿으려 하지 않죠 395 00:19:08,458 --> 00:19:11,708 형상을 뇌에 전달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몰라요 396 00:19:11,791 --> 00:19:13,208 임다드 칸은 조용해졌다 397 00:19:13,291 --> 00:19:14,208 피로해 보였다 398 00:19:14,291 --> 00:19:15,666 '어떤 방법이 있나요?' 내가 물었다 399 00:19:17,750 --> 00:19:19,333 솔직히 저도 모릅니다 400 00:19:21,083 --> 00:19:23,958 신체의 다른 부분이 보는 거죠 401 00:19:24,041 --> 00:19:24,958 어느 부분이요? 402 00:19:35,125 --> 00:19:36,666 그날 밤, 난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403 00:19:36,750 --> 00:19:39,833 과학자들이 알면 난리가 날 만한 일이었다 404 00:19:39,916 --> 00:19:41,875 현존하는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405 00:19:41,958 --> 00:19:45,625 그 원리를 알아내야 했다 생물학이든, 화학이든, 마법이든 406 00:19:45,708 --> 00:19:48,375 눈으로 보지 않고도 형상을 뇌로 전하는 원리를 407 00:19:48,458 --> 00:19:51,833 맹인이 보고, 농인이 듣고 뭐든 가능할지도 모른다 408 00:19:51,916 --> 00:19:54,541 이 엄청난 사람의 존재가 묻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409 00:19:54,625 --> 00:19:58,333 그날 밤 임다드 칸이 한 얘기를 모두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410 00:19:58,416 --> 00:20:00,416 쉬지 않고 5시간 동안 썼다 411 00:20:03,125 --> 00:20:06,583 아침 8시에 병원에 갔다 중요한 부분은 모두 적은 후였다 412 00:20:06,666 --> 00:20:08,041 방금 여러분이 읽은 부분이다 413 00:20:08,125 --> 00:20:10,958 마셜 선생은 휴식 시간에야 만날 수 있었다 414 00:20:11,041 --> 00:20:13,291 그 10분 동안 최대한 많은 얘길 해줬다 415 00:20:13,375 --> 00:20:15,916 '극장에 가볼 거야' 내가 말했다 '이대로 놓칠 순 없어' 416 00:20:16,000 --> 00:20:17,291 나도 같이 가지 417 00:20:17,375 --> 00:20:19,875 오후 6시 45분, 차를 몰고 로열팰리스 홀로 갔다 418 00:20:19,958 --> 00:20:22,041 주차하고 극장 쪽으로 걸어갔다 419 00:20:22,541 --> 00:20:24,250 '뭔가 이상해' 내가 말했다 420 00:20:24,333 --> 00:20:26,625 관람객도 없고 문도 닫혀 있었다 421 00:20:26,708 --> 00:20:30,666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그 위에 뭔가 적혀 있었다 422 00:20:30,750 --> 00:20:32,833 '오늘 공연 취소' 423 00:20:33,875 --> 00:20:37,208 잠긴 문 옆의 수위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424 00:20:37,291 --> 00:20:38,583 사람이 죽었습니다 425 00:20:38,666 --> 00:20:39,500 '누가요?' 426 00:20:39,583 --> 00:20:40,958 물론 누군지 알고 있었다 427 00:20:41,041 --> 00:20:42,916 눈 없이도 보는 남자입니다 428 00:20:43,666 --> 00:20:45,208 '어쩌다가요?' 내가 외쳤다 429 00:20:45,291 --> 00:20:47,250 잠자리에 들었다가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430 00:20:48,208 --> 00:20:49,375 흔히 있는 일이죠 431 00:20:52,750 --> 00:20:54,416 차로 천천히 돌아갔다 432 00:20:59,125 --> 00:21:01,500 엄청난 슬픔과 분노가 밀려들었다 433 00:21:01,583 --> 00:21:03,583 그 귀한 사람 곁에서 떨어지지 말걸 434 00:21:03,666 --> 00:21:05,500 내 침실을 내주고 돌볼걸 435 00:21:05,583 --> 00:21:07,000 임다드 칸은 기적을 행했고 436 00:21:07,083 --> 00:21:11,333 범인들은 닿을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을 지닌 이였다 437 00:21:11,416 --> 00:21:13,083 그런 그가 죽었다 438 00:21:13,166 --> 00:21:14,833 '끝났군' 마셜이 말했다 439 00:21:15,625 --> 00:21:16,541 끝났군 440 00:21:17,500 --> 00:21:18,500 '그래' 내가 말했다 441 00:21:19,833 --> 00:21:20,750 '끝났어' 442 00:21:25,625 --> 00:21:28,083 임다드 칸과의 두 번의 만남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443 00:21:28,166 --> 00:21:30,291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기록하는 바이다 444 00:21:33,416 --> 00:21:34,625 이런 445 00:21:35,708 --> 00:21:37,791 아주 흥미로운 얘기로군 446 00:21:39,166 --> 00:21:41,333 정말 엄청난 정보잖아 447 00:21:42,916 --> 00:21:44,333 내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겠어 448 00:22:04,125 --> 00:22:06,541 헨리가 말한 정보라 함은 449 00:22:06,625 --> 00:22:08,750 임다드 칸이 연습을 통해 450 00:22:08,833 --> 00:22:11,833 뒷면만 보고도 무슨 카드인지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451 00:22:11,916 --> 00:22:14,541 앞서 언급했듯 정직하지 못한 도박꾼으로서 452 00:22:14,625 --> 00:22:16,291 헨리는 직감했던 것이다 453 00:22:16,375 --> 00:22:18,083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걸 454 00:22:18,166 --> 00:22:20,500 아래층 식기실로 내려가 455 00:22:20,583 --> 00:22:23,208 초와 촛대, 자를 받아서는 456 00:22:23,291 --> 00:22:27,041 침실로 가져가 문을 잠그고 커튼을 친 다음 불을 껐다 457 00:22:27,125 --> 00:22:29,625 화장대에 초를 올려놓고 의자를 가져왔다 458 00:22:29,708 --> 00:22:33,083 초의 심지가 자기 눈높이와 정확히 맞는 걸 보고 만족했다 459 00:22:33,166 --> 00:22:37,000 자를 사용해 얼굴과 초 사이의 거리를 40cm로 맞췄다 460 00:22:37,083 --> 00:22:38,541 책에 적힌 대로였다 461 00:22:38,625 --> 00:22:42,125 임다드 칸은 가장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떠올렸는데 462 00:22:42,208 --> 00:22:44,666 그의 경우엔 죽은 형이었다 463 00:22:44,750 --> 00:22:46,458 헨리에겐 형제가 없었다 464 00:22:47,041 --> 00:22:49,958 본인 얼굴을 떠올리기로 했다 465 00:22:56,750 --> 00:22:59,875 촛불 가장 안쪽의 작은 검은 부분을 바라보자 466 00:22:59,958 --> 00:23:01,583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467 00:23:01,666 --> 00:23:04,791 머릿속이 완전히 텅 비면서 뇌가 움직임을 멈췄고 468 00:23:04,875 --> 00:23:08,083 갑자기 불타는 공허와도 같은 촛불의 작은 검은 부분이 469 00:23:08,166 --> 00:23:11,708 편하고 아늑하게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470 00:23:12,291 --> 00:23:14,500 지속된 시간은 겨우 15초였다 471 00:23:14,583 --> 00:23:16,791 하지만 그 후로 어디서 뭘 하든 472 00:23:16,875 --> 00:23:20,291 이런 촛불 훈련을 하루 5번씩은 꼭 했다 473 00:23:20,375 --> 00:23:24,041 이렇게 열정적으로 무슨 일에 집중한 것은 처음이었고 474 00:23:24,125 --> 00:23:26,291 그 성과는 매우 놀라웠다 475 00:23:27,166 --> 00:23:28,166 6개월 후에는 476 00:23:28,250 --> 00:23:31,625 머릿속 자신의 얼굴에만 3분 동안 집중할 수 있었다 477 00:23:31,708 --> 00:23:34,000 그 어떤 다른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478 00:23:34,625 --> 00:23:36,166 '나였어' 헨리는 생각했다 479 00:23:36,250 --> 00:23:38,375 '엄청난 속도로 요가 수련을 완성할 수 있는' 480 00:23:38,458 --> 00:23:40,791 '십억 명 중 한 명이 나였어' 481 00:23:41,333 --> 00:23:44,000 1년이 다 돼 갈 즈음엔 5분 30초로 늘어났다 482 00:23:45,250 --> 00:23:46,375 때가 왔다 483 00:23:50,666 --> 00:23:52,833 헨리의 런던 집 거실, 자정 484 00:23:52,916 --> 00:23:54,458 헨리는 기대감에 몸을 떨며 485 00:23:54,541 --> 00:23:57,291 처음으로 카드 한 벌을 뒷면이 보이도록 놓고 486 00:23:57,375 --> 00:23:59,041 맨 위의 카드에 집중한다 487 00:23:59,125 --> 00:24:02,833 처음엔 빨간 선들로 이뤄진 카드 뒷면의 무늬만이 보인다 488 00:24:02,916 --> 00:24:05,750 세계적으로 가장 흔한 카드 뒷면 디자인일 것이다 489 00:24:05,833 --> 00:24:09,375 헨리는 곧 카드의 반대쪽 면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490 00:24:09,458 --> 00:24:13,500 보이지 않는 카드 아래쪽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다 491 00:24:13,583 --> 00:24:16,416 30초가 흐른다 1분, 2분, 3분 492 00:24:16,500 --> 00:24:17,916 헨리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493 00:24:18,000 --> 00:24:20,500 고도로 발달된 집중력은 가히 완벽하다 494 00:24:20,583 --> 00:24:22,500 카드 반대쪽 면을 연상한다 495 00:24:22,583 --> 00:24:25,000 그 어떤 다른 생각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못한다 496 00:24:25,083 --> 00:24:27,375 4분이 지나자 뭔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497 00:24:27,458 --> 00:24:29,333 천천히, 마법처럼 하지만 명확하게 498 00:24:29,416 --> 00:24:33,125 검은 점은 스페이드가 되고 꼬불거리는 선은 5가 된다 499 00:24:33,208 --> 00:24:34,708 스페이드 5 500 00:24:34,791 --> 00:24:38,000 헨리는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집어 뒤집는다 501 00:24:39,041 --> 00:24:40,250 '해냈어' 헨리가 말한다 502 00:24:41,333 --> 00:24:42,541 광분하는 헨리 503 00:24:42,625 --> 00:24:44,791 식음료 사러 갈 때 외엔 집에서 나가지 않는다 504 00:24:45,375 --> 00:24:47,250 온종일, 때론 밤 늦게까지 505 00:24:47,333 --> 00:24:49,583 스톱워치를 들고 카드를 들여다보며 506 00:24:49,666 --> 00:24:51,833 1초씩, 1초씩 기록을 단축한다 507 00:24:51,916 --> 00:24:54,791 한 달 후엔 1분 30초 6개월 후엔 20초 508 00:24:54,875 --> 00:24:56,708 다시 7개월 후엔 10초 509 00:24:56,791 --> 00:24:58,000 목표는 5초다 510 00:24:58,083 --> 00:25:00,708 최대 5초 안에 카드를 읽지 못하면 511 00:25:00,791 --> 00:25:02,875 카지노에서 이 방법은 쓸 수 없을 테니까 512 00:25:02,958 --> 00:25:06,083 목표에 가까워질수록 달성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513 00:25:07,000 --> 00:25:09,166 10초에서 9초가 되는 데에 4주가 걸리고 514 00:25:09,250 --> 00:25:11,083 9초에서 8초가 되는 데에 5주가 걸린다 515 00:25:11,166 --> 00:25:15,375 이제 강도 높은 훈련도 12시간 연속 연습도 힘들지 않다 516 00:25:15,458 --> 00:25:17,791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517 00:25:17,875 --> 00:25:20,333 마지막 2초가 가장 힘들다 11개월이 걸린다 518 00:25:20,416 --> 00:25:22,041 어느 토요일의 늦은 오후 519 00:25:29,708 --> 00:25:33,583 5초, 헨리는 나머지 카드 모두 시간을 재가며 읽는다 520 00:25:33,666 --> 00:25:37,458 5초 521 00:25:38,500 --> 00:25:40,833 이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522 00:25:41,666 --> 00:25:43,708 3년 3개월간의 부단한 노력 523 00:25:46,208 --> 00:25:48,625 런던에는 합법적 카지노가 100군데 넘게 있었다 524 00:25:48,708 --> 00:25:52,750 헨리는 그중 10군데의 회원이었고 로드하우스를 가장 좋아했다 525 00:25:52,833 --> 00:25:56,041 웅장한 조지아풍 건축물에 자리한 런던 최고의 카지노였다 526 00:25:56,125 --> 00:25:57,166 안녕하십니까, 슈거 씨 527 00:25:57,250 --> 00:25:59,916 얼굴을 기억하는 게 직업인 남자가 말했다 528 00:26:00,000 --> 00:26:03,125 근사한 계단을 올라 칩 교환소로 향했다 529 00:26:03,208 --> 00:26:05,250 1만 파운드짜리 수표를 썼다 530 00:26:05,333 --> 00:26:07,250 룰렛 판 주위에 모인 여자들은 531 00:26:07,333 --> 00:26:09,416 모이통에 모여든 토실한 암탉 떼 같았고 532 00:26:09,500 --> 00:26:12,458 불콰한 얼굴에 시가를 물고 칩을 세는 남자들은 533 00:26:12,541 --> 00:26:14,125 탐욕 가득한 눈빛이었다 534 00:26:15,541 --> 00:26:17,541 기이하게도 헨리는 생전 처음으로 535 00:26:17,625 --> 00:26:20,583 지긋지긋한 부자들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보았다 536 00:26:20,666 --> 00:26:22,291 헨리는 블랙잭 테이블 중 537 00:26:22,375 --> 00:26:25,166 딜러의 오른쪽 자리가 비어 있는 곳을 찾았다 538 00:26:25,250 --> 00:26:28,250 딜러는 헨리의 플라크를 빈 슬롯에 꽂아 넣었다 539 00:26:28,333 --> 00:26:31,458 젊은-듯도 한 딜러는 검은 눈에 잿빛 피부의 남자로 540 00:26:31,541 --> 00:26:33,791 절대 웃지 않았으며 필요한 말만 했는데 541 00:26:33,875 --> 00:26:36,583 아주 가느다란 손가락에 계산기라도 달린 듯했다 542 00:26:36,666 --> 00:26:39,875 25파운드짜리 칩 여러 개를 집어 쌓아놓았는데 543 00:26:39,958 --> 00:26:42,708 셀 필요도 없었다 그의 손가락은 늘 정확하니까 544 00:26:42,791 --> 00:26:44,250 칩을 헨리 앞으로 밀어놓았다 545 00:26:44,333 --> 00:26:45,708 헨리는 칩을 정리하며 546 00:26:45,791 --> 00:26:47,875 딜러의 슈 속 제일 위 카드를 보았다 547 00:26:47,958 --> 00:26:51,375 5초 안에 10이라는 걸 알고 칩 8개, 2백 파운드를 밀어놓았다 548 00:26:51,458 --> 00:26:53,583 로드하우스에서 허용되는 최대 베팅이었다 549 00:26:53,666 --> 00:26:56,083 10 카드를 받았고 두 번째는 9였다 550 00:26:56,166 --> 00:26:57,333 합이 19 551 00:26:57,416 --> 00:26:58,416 그럴 땐 카드를 그만 받고 552 00:26:58,500 --> 00:27:02,083 딜러의 패가 20이나 21이 아니길 바라는 게 정석이다 553 00:27:02,166 --> 00:27:04,708 - 딜러가 헨리를 향해… - 19입니다 554 00:27:04,791 --> 00:27:07,333 그리고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잠깐만요' 헨리가 말했다 555 00:27:07,416 --> 00:27:08,958 딜러가 다시 헨리 쪽을 보았다 556 00:27:09,041 --> 00:27:11,333 차가운 눈빛에 눈썹을 치켜올린 채였다 557 00:27:11,416 --> 00:27:13,583 - 19인데 더 받으시겠습니까? - 건조한 어조로 물었다 558 00:27:13,666 --> 00:27:17,208 패를 망치지 않을 카드는 에이스와 2, 둘뿐이고 559 00:27:17,291 --> 00:27:21,250 2백 파운드나 베팅하고 카드를 더 받을 바보는 없다 560 00:27:21,333 --> 00:27:24,375 딜러가 건드리지도 않은 다음 카드의 뒷면이 보였다 561 00:27:24,458 --> 00:27:27,833 '네, 한 장 더요' 헨리가 말했다 어깨를 으쓱하고 카드를 주는 딜러 562 00:27:27,916 --> 00:27:31,083 헨리 앞의 10과 9 카드 옆에 클로버 2 카드가 놓였다 563 00:27:31,166 --> 00:27:32,708 - 21입니다 - 딜러가 침착하게 말했다 564 00:27:32,791 --> 00:27:35,750 그의 검은 눈동자가 헨리의 얼굴에 머물렀다 565 00:27:35,833 --> 00:27:37,500 조용히 경계하는 당황한 눈빛 566 00:27:38,666 --> 00:27:40,083 헨리 때문에 평정심을 잃었다 567 00:27:40,166 --> 00:27:42,208 19에서 카드를 받는 일은 없는데 568 00:27:42,291 --> 00:27:46,333 침착하게, 확신에 차서 카드를 받은 데다 따버렸으니까 569 00:27:47,083 --> 00:27:50,166 딜러의 눈빛을 본 헨리는 실수했음을 직감했다 570 00:27:50,250 --> 00:27:52,500 관심을 끌어버린 것이다 '실례합니다' 571 00:27:52,583 --> 00:27:54,000 다시는 그래선 안 된다 572 00:27:54,083 --> 00:27:57,125 매우 조심해야 하고 가끔씩 잃기도 해야 했다 573 00:27:57,208 --> 00:27:58,250 게임은 계속됐다 574 00:27:58,333 --> 00:28:00,041 너무나도 유리한 상황인지라 575 00:28:00,125 --> 00:28:02,583 적당히 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576 00:28:02,666 --> 00:28:05,416 1시간 동안 3만 파운드를 땄고 거기서 멈췄다 577 00:28:05,500 --> 00:28:07,208 백만 파운드도 딸 수 있었을 것이다 578 00:28:08,000 --> 00:28:09,208 고마워요 579 00:28:09,291 --> 00:28:11,958 이제 헨리는 세상 누구보다도 빠르게 580 00:28:12,041 --> 00:28:14,291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581 00:28:16,666 --> 00:28:17,500 흥미로운 일이다 582 00:28:22,041 --> 00:28:24,333 이게 실화가 아니라 허구의 이야기였다면 583 00:28:24,416 --> 00:28:28,583 놀랍고도 흥미진진한 엔딩을 만들어 내야 했을 것이다 584 00:28:28,666 --> 00:28:30,250 드라마틱하고 독특한 엔딩을 585 00:28:30,333 --> 00:28:33,416 예를 들면 헨리가 집에 가서 돈을 세는데 586 00:28:33,500 --> 00:28:36,333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고 587 00:28:36,416 --> 00:28:37,875 가슴에 통증이 느껴진다 588 00:28:38,875 --> 00:28:41,333 당장 쉬기로 마음먹고 옷을 벗은 다음 589 00:28:41,416 --> 00:28:43,250 알몸으로 잠옷을 입으러 가는데 590 00:28:43,333 --> 00:28:46,458 벽에 걸린 전신 거울 앞을 지나다가 멈춰 선다 591 00:28:46,541 --> 00:28:49,541 그리고 습관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한다 592 00:28:49,625 --> 00:28:51,833 문득 몸속이 꿰뚫어 보인다 593 00:28:51,916 --> 00:28:54,250 엑스레이보다 더 명확해서 모든 게 다 보인다 594 00:28:54,333 --> 00:28:56,666 동맥, 정맥, 혈관을 흐르는 피 595 00:28:56,750 --> 00:28:59,541 간, 신장, 소장, 펄떡거리는 심장 596 00:28:59,625 --> 00:29:01,708 통증이 느껴지는 곳을 보니 597 00:29:01,791 --> 00:29:05,958 우측 심장으로 들어가는 대정맥에 작은 검은 덩어리가 있다 598 00:29:06,041 --> 00:29:08,916 혈전이다 처음엔 멈춰 있는 듯하다 599 00:29:09,000 --> 00:29:12,083 그러다 움직인다 1mm쯤, 살짝 이동한다 600 00:29:12,166 --> 00:29:16,083 혈액이 혈전을 지나 올라가자 혈전이 다시 움직인다 601 00:29:16,166 --> 00:29:19,166 1cm 넘게 전진하는데 헨리는 두려움 속에 지켜본다 602 00:29:19,250 --> 00:29:22,166 정맥을 따라 움직이는 커다란 혈전은 603 00:29:22,250 --> 00:29:23,666 결국 심장으로 들어갈 테니까 604 00:29:24,208 --> 00:29:25,500 곧 죽는 것이다 605 00:29:25,583 --> 00:29:29,416 허구의 엔딩으로는 괜찮지만 이건 허구가 아니라 팩트다 606 00:29:29,500 --> 00:29:32,333 사실이 아닌 것은 헨리 슈거라는 이름뿐이다 607 00:29:32,416 --> 00:29:35,750 본명은 알릴 수 없고 알려서도 안 된다 608 00:29:35,833 --> 00:29:37,875 그 외엔 모두 실화이며 609 00:29:37,958 --> 00:29:41,000 그러므로 진짜 엔딩이 존재한다 610 00:29:41,083 --> 00:29:42,583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렇다 611 00:29:46,916 --> 00:29:48,208 헨리는 1시간 동안 걸었다 612 00:29:48,291 --> 00:29:51,583 선선하고 쾌적한 저녁 도시의 활기는 여전했다 613 00:29:51,666 --> 00:29:55,041 재킷 안주머니에 든 두툼한 돈다발을 느끼고는 614 00:29:55,125 --> 00:29:56,500 톡톡 두드렸다 615 00:29:56,583 --> 00:29:58,708 1시간이나 들고 다니기엔 큰돈이지만 616 00:29:58,791 --> 00:30:00,791 그런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617 00:30:00,875 --> 00:30:04,583 이런 대성공을 거뒀는데도 별로 신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 618 00:30:04,666 --> 00:30:07,333 수행하기 전인 3년 전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619 00:30:07,416 --> 00:30:09,041 극도로 흥분해서는 620 00:30:09,125 --> 00:30:11,666 가까운 나이트클럽으로 달려가 축배를 들었겠지만 621 00:30:11,750 --> 00:30:13,750 전혀 신이 나지 않았다 622 00:30:13,833 --> 00:30:15,083 오히려 슬펐다 623 00:30:15,166 --> 00:30:17,916 베팅만 하면 딸 게 확실하니 624 00:30:18,000 --> 00:30:20,541 스릴도, 서스펜스도 위험부담도 없는 것이다 625 00:30:21,166 --> 00:30:24,083 이제 전 세계를 여행하며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지만 626 00:30:24,166 --> 00:30:25,750 그게 재미가 있을까? 627 00:30:25,833 --> 00:30:28,000 또 한 가지 이런 가능성은 없을까? 628 00:30:28,083 --> 00:30:30,166 수련을 통해 능력을 얻는 과정에서 629 00:30:30,250 --> 00:30:33,833 헨리의 인생관이 완전히 달라졌을 가능성 630 00:30:33,916 --> 00:30:35,041 가능한 일이었다 631 00:30:35,750 --> 00:30:38,458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 일어난 헨리의 눈에 632 00:30:38,541 --> 00:30:41,916 화장대에 놓인 엄청난 돈다발이 들어왔는데 633 00:30:42,541 --> 00:30:43,416 갖고 싶지가 않았다 634 00:31:07,500 --> 00:31:08,333 뭡니까? 635 00:31:08,416 --> 00:31:11,875 안녕하십니까 선생한테 드리는 선물입니다 636 00:31:11,958 --> 00:31:12,791 어… 637 00:31:14,000 --> 00:31:14,833 뭐요? 638 00:31:15,625 --> 00:31:16,958 주머니에 넣으세요! 639 00:31:18,458 --> 00:31:19,291 그럽시다 640 00:31:28,208 --> 00:31:29,250 뭐지? 641 00:31:29,333 --> 00:31:30,166 돈이야 642 00:31:30,250 --> 00:31:31,083 가져요! 643 00:31:37,583 --> 00:31:38,416 이봐요! 644 00:31:41,875 --> 00:31:42,708 저것 봐 645 00:32:17,541 --> 00:32:18,708 초인종이 울렸다 646 00:32:18,791 --> 00:32:20,541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647 00:32:20,625 --> 00:32:23,208 안녕하십니까, 죄송합니다 돈을 나눠주고 있었거든요 648 00:32:23,291 --> 00:32:25,750 - 폭동을 일으킨 거요! - 돈을 나눠준 건데요 649 00:32:25,833 --> 00:32:28,000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곧 다들 흩어질 거예요 650 00:32:28,083 --> 00:32:31,000 경관은 뒷짐 졌던 손을 풀어 50파운드 지폐를 내밀었다 651 00:32:31,083 --> 00:32:34,333 - 하나 챙기셨군요 - 증거물입니다, 돈의 출처는요? 652 00:32:34,416 --> 00:32:37,166 블랙잭에서 땄습니다 어제 운이 무척 좋았거든요 653 00:32:37,250 --> 00:32:39,875 헨리가 카지노 이름을 말하자 경관은 수첩에 받아적었다 654 00:32:39,958 --> 00:32:41,333 아마 확인해 줄 겁니다 655 00:32:41,416 --> 00:32:42,583 경관은 수첩을 내렸다 656 00:32:42,666 --> 00:32:43,666 - 상관없습니다 - 그런가요? 657 00:32:43,750 --> 00:32:46,583 전혀요 선생 이야기를 믿습니다만 658 00:32:46,666 --> 00:32:49,541 그렇다고 좀 전 행동의 변명은 되지 않습니다 659 00:32:49,625 --> 00:32:51,958 불법적인 일은 안 했는데요 660 00:32:52,791 --> 00:32:53,708 불법이요? 661 00:32:54,458 --> 00:32:55,583 어리석은 사람! 662 00:32:56,333 --> 00:32:59,708 운이 좋아서 그렇게 큰돈을 땄는데 663 00:32:59,791 --> 00:33:02,750 마구 나눠주고 싶다면 창밖으로 던질 게 아니라 664 00:33:02,833 --> 00:33:04,791 좋은 곳에 썼어야지요 665 00:33:04,875 --> 00:33:06,958 병원이나 고아원 같은 곳에요 666 00:33:07,041 --> 00:33:09,125 전국의 수많은 병원과 고아원들은 667 00:33:09,208 --> 00:33:12,375 돈이 없어서 아이들 크리스마스 선물도 못 사주는데 668 00:33:12,458 --> 00:33:14,208 어려움이라고는 겪어본 적 없는 669 00:33:14,291 --> 00:33:16,666 세상 물정 모르는 웬 부잣집 아들이 670 00:33:16,750 --> 00:33:19,666 길바닥에 돈을 마구 뿌리다니요! 671 00:33:19,750 --> 00:33:22,666 경관은 그 말을 남기고 쿵쾅대며 계단을 내려갔다 672 00:33:22,750 --> 00:33:23,666 헨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673 00:33:23,750 --> 00:33:27,750 분노에 차 뱉어낸 경관의 말이 마음 깊이 꽂혀버린 것이다 674 00:33:27,833 --> 00:33:28,708 부끄러웠다 675 00:33:29,458 --> 00:33:30,708 끔찍한 기분이었다 676 00:33:36,916 --> 00:33:38,000 그리고 갑자기 677 00:33:38,083 --> 00:33:41,500 강력한 전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는 느낌이 들더니 678 00:33:41,583 --> 00:33:45,208 모든 걸 바꿔놓을 훌륭하고도 근사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679 00:33:45,291 --> 00:33:46,791 헨리는 방을 왔다 갔다 하며 680 00:33:46,875 --> 00:33:49,916 그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방법들을 생각했다 681 00:33:50,000 --> 00:33:54,708 첫째, 나는 앞으로 평생 매일 엄청난 돈을 딸 것이다 682 00:33:55,500 --> 00:33:59,250 둘째, 같은 카지노 방문은 6개월에 한 번으로 제한한다 683 00:33:59,333 --> 00:34:02,000 셋째, 한 자리에서 너무 많이 따면 안 된다 684 00:34:02,083 --> 00:34:04,333 하룻밤에 5만 파운드를 최대로 한다 685 00:34:04,416 --> 00:34:08,166 넷째, 하루 5만 파운드씩 1년 365일이면 686 00:34:08,250 --> 00:34:10,916 1,825만 파운드다 687 00:34:11,000 --> 00:34:12,166 다섯째, 계속 이동한다 688 00:34:12,250 --> 00:34:14,791 한 도시에서 3일 넘게 머무르지 않는다 689 00:34:14,875 --> 00:34:16,958 런던, 몬테카를로, 칸, 비아리츠 690 00:34:17,041 --> 00:34:20,083 도빌, 라스베이거스, 멕시코시티 부에노스아이레스, 나소 691 00:34:20,166 --> 00:34:24,416 여섯째, 번 돈으로 전 세계에 병원과 고아원을 짓는다 692 00:34:24,500 --> 00:34:26,791 맞아, 그냥 꿈이라면 진부한 감상이겠지만 693 00:34:26,875 --> 00:34:29,083 난 분명히 이 일을 해낼 수 있어 694 00:34:29,166 --> 00:34:33,208 진부하기는커녕 정말이지 근사할 거라고 695 00:34:33,291 --> 00:34:34,791 일곱째, 파트너가 필요하다 696 00:34:34,875 --> 00:34:38,541 책상머리에 앉아 돈을 받아서 필요한 곳에 보낼 사람 697 00:34:38,625 --> 00:34:41,791 내가 언제까지나 진정으로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 698 00:34:41,875 --> 00:34:45,041 존 윈스턴은 헨리의 부친과 헨리의 회계사였고 699 00:34:45,125 --> 00:34:47,708 존 윈스턴의 부친은 헨리의 부친의 부친의 회계사였다 700 00:34:47,791 --> 00:34:49,708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701 00:34:51,833 --> 00:34:54,000 세계 최고의 부자는 되고 싶지 않은데 702 00:34:56,583 --> 00:34:59,250 잉글랜드에선 못 합니다 세금으로 다 뺏길 거예요 703 00:34:59,333 --> 00:35:01,416 스위스로 가야 하는데 당장은 안 됩니다 704 00:35:01,500 --> 00:35:04,125 슈거 씨처럼 부양가족 없는 혼자 몸이 아니니까요 705 00:35:04,208 --> 00:35:07,000 가족과도 얘기하고 동업자들에게도 알리고 706 00:35:07,083 --> 00:35:09,541 여기 집을 팔고 스위스에 집을 마련해야 하고 707 00:35:09,625 --> 00:35:11,916 애들 전학 문제도 있고 시간이 걸립니다 708 00:35:12,000 --> 00:35:15,125 1년 후, 헨리가 로잔에 있는 윈스턴에게 보낸 돈은 709 00:35:15,208 --> 00:35:17,000 총 1억 2천만 파운드였다 710 00:35:17,083 --> 00:35:18,708 헨리는 일주일에 5일 711 00:35:18,791 --> 00:35:21,541 윈스턴 슈거 LLC라는 스위스 소재 회사로 송금했다 712 00:35:21,625 --> 00:35:25,708 돈의 출처와 사용처를 아는 건 존과 헨리뿐이었다 713 00:35:25,791 --> 00:35:27,458 월요일 송금액이 가장 컸는데 714 00:35:27,541 --> 00:35:30,125 은행이 문을 닫는 금, 토, 일요일 분량을 715 00:35:30,208 --> 00:35:31,333 한꺼번에 보냈기 때문이다 716 00:35:31,416 --> 00:35:33,041 헨리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717 00:35:33,125 --> 00:35:35,750 한 주에 여러 차례 신원을 바꿀 때도 있었다 718 00:35:35,833 --> 00:35:38,416 존은 헨리가 돈을 보내는 은행의 주소를 보고 719 00:35:38,500 --> 00:35:40,833 헨리의 거취를 짐작할 뿐이었다 720 00:35:40,916 --> 00:35:42,250 그야말로 근사한 일이었다 721 00:36:02,541 --> 00:36:05,958 헨리는 63세이던 작년에 폐색전으로 사망했다 722 00:36:06,041 --> 00:36:09,166 다가오는 죽음을 직접 봤지만 마음은 매우 평화로웠다 723 00:36:09,250 --> 00:36:11,833 계획대로 움직인 지 20년이 조금 넘은 시기였고 724 00:36:11,916 --> 00:36:14,458 총 6억 4천4백만 파운드를 벌었다 725 00:36:14,541 --> 00:36:15,500 또한 전 세계에 726 00:36:15,583 --> 00:36:19,208 21개의 훌륭한 어린이 병원과 고아원을 지어 훌륭히 운영했는데 727 00:36:19,291 --> 00:36:23,333 행정 및 재정 관리는 로잔에 있는 존 윈스턴과 직원들이 담당했다 728 00:36:23,416 --> 00:36:24,666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729 00:36:29,125 --> 00:36:31,375 그럼 나는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 730 00:36:31,458 --> 00:36:33,208 좋은 질문이다, 대답하겠다 731 00:36:33,291 --> 00:36:36,791 헨리가 죽고 얼마 안 있어 스위스의 존이 전화를 걸어 왔다 732 00:36:36,875 --> 00:36:38,291 자신을 간단히 소개했는데 733 00:36:38,375 --> 00:36:41,750 윈스턴 슈거 LLC라는 회사의 대표라고 했다 734 00:36:41,833 --> 00:36:44,000 나더러 로잔으로 와서 자길 만나고 735 00:36:44,083 --> 00:36:47,000 회사의 간략한 역사를 글로 써보겠냐고 했다 736 00:36:47,625 --> 00:36:49,250 날 선택한 경위는 알 수 없다 737 00:36:49,333 --> 00:36:52,125 작가 명단을 앞에 놓고 아무 데나 찍은 걸지도 738 00:36:52,208 --> 00:36:54,375 원고료는 후하게 쳐주겠다며 덧붙였다 739 00:36:54,458 --> 00:36:56,583 '얼마 전에 대단한 인물이 사망했습니다' 740 00:36:56,666 --> 00:36:58,291 '헨리 슈거라는 분이지요' 741 00:36:58,375 --> 00:37:02,125 '그분이 세상을 위해 한 일을 조금은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742 00:37:02,208 --> 00:37:03,916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743 00:37:04,000 --> 00:37:07,541 글로 적어 출판할 정도로 흥미로운 이야기냐고 물었는데 744 00:37:07,625 --> 00:37:11,041 존 윈스턴은 빈정이 상했다 모욕으로 받아들인 듯도 했다 745 00:37:11,625 --> 00:37:13,083 5분간 통화하며 746 00:37:13,166 --> 00:37:16,041 헨리 슈거의 비밀스러운 행적에 대해 들었다 747 00:37:16,125 --> 00:37:17,541 이젠 비밀이 아니었다 748 00:37:17,625 --> 00:37:21,083 헨리는 죽었고 카지노에 갈 일은 없으니까 749 00:37:21,166 --> 00:37:23,083 '가지요' 내가 말했다 750 00:37:23,166 --> 00:37:26,000 나는 로잔에서 일흔이 넘은 존 윈스턴을 만났다 751 00:37:26,083 --> 00:37:27,291 동석한 맥스 잉글먼은 752 00:37:27,375 --> 00:37:30,583 저명한 메이크업 전문가로서 헨리와 전 세계를 다니며 753 00:37:30,666 --> 00:37:33,166 훌륭한 분장 솜씨로 신원을 감춰줬다 754 00:37:33,250 --> 00:37:37,333 둘 다 헨리의 죽음에 무너졌는데 맥스는 존 윈스턴보다 더 심했다 755 00:37:37,416 --> 00:37:39,625 그를 사랑했습니다 위대한 사람이었어요 756 00:37:39,708 --> 00:37:42,666 존 윈스턴은 짙은 푸른색 연습장을 실제로 보여줬다 757 00:37:42,750 --> 00:37:45,666 Z.Z. 차터지가 1935년에 캘커타에서 기록한 내용이었다 758 00:37:45,750 --> 00:37:47,833 나는 그 내용을 그대로 필사했다 759 00:37:47,916 --> 00:37:49,375 '하나만 더 묻죠' 내가 말했다 760 00:37:49,458 --> 00:37:53,083 '계속 헨리 슈거라 칭하면서 진짜 이름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761 00:37:53,166 --> 00:37:56,375 '이야기를 통해 그분의 신원을 밝히지 않기를 원하시나요?' 762 00:37:56,458 --> 00:37:57,750 - 그래요 - 존 윈스턴이 대답했다 763 00:37:57,833 --> 00:38:00,208 그분 신원을 밝히지 않기로 맥스와 약속했습니다 764 00:38:00,291 --> 00:38:02,750 아마 조만간에 알려지긴 하겠죠 765 00:38:02,833 --> 00:38:04,833 영국의 유명한 가문 출신이니까요 766 00:38:04,916 --> 00:38:07,500 그래도 알아내려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767 00:38:07,583 --> 00:38:09,791 부탁이니 헨리 슈거 씨라고 칭해주세요 768 00:38:11,833 --> 00:38:13,291 난 그 말대로 했다 769 00:38:20,791 --> 00:38:24,583 "로알드 달은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를" 770 00:38:24,666 --> 00:38:28,375 "버킹엄셔 그레이트 미센든의 작업실 '집시 하우스'에서" 771 00:38:28,458 --> 00:38:31,416 "1976년 2월부터 12월에 걸쳐 집필했다" 772 00:38:37,458 --> 00:38:40,583 "백조" 773 00:38:40,666 --> 00:38:42,166 "오솔길" 774 00:38:42,250 --> 00:38:44,583 어니는 생일 선물로 라이플총을 받았다 775 00:38:45,166 --> 00:38:48,291 총과 총알 한 상자를 들고 뭘 죽여볼까, 하며 나섰다 776 00:38:48,833 --> 00:38:50,041 레이먼드의 집 앞에서 777 00:38:50,125 --> 00:38:53,458 두 손가락을 입에 넣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778 00:38:54,250 --> 00:38:57,125 레이먼드는 어니의 단짝으로 네 집 건너에 살았다 779 00:38:57,208 --> 00:38:59,250 어니가 총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780 00:38:59,333 --> 00:39:01,833 '죽이네!' 레이먼드가 말했다 '갖고 놀면 재밌겠는걸!' 781 00:39:03,125 --> 00:39:06,375 두 소년은 길을 나섰다 5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782 00:39:06,458 --> 00:39:08,416 밤나무엔 꽃이 만발했고 783 00:39:08,500 --> 00:39:10,958 하얀 산사나무 꽃은 산울타리를 따라 피어 있었다 784 00:39:11,041 --> 00:39:13,875 어니와 레이먼드는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며 785 00:39:13,958 --> 00:39:15,958 보이는 새마다 쏴댔다 786 00:39:16,041 --> 00:39:18,875 피리새, 바위종다리 딱새, 노랑턱멧새 787 00:39:18,958 --> 00:39:20,625 철로에 도달할 때쯤엔 788 00:39:20,708 --> 00:39:23,583 작은 새 14마리가 줄에 매달려 있었다 789 00:39:24,416 --> 00:39:27,583 '저기!' 어니가 팔을 쭉 뻗어 가리키며 속삭였다, '저기 봐!' 790 00:39:27,666 --> 00:39:29,500 덤불 너머에서 작은 소년 하나가 791 00:39:29,583 --> 00:39:32,166 망원경으로 어느 고목을 보고 있었다 792 00:39:32,250 --> 00:39:33,833 '멍청한 왓슨 자식이야!' 793 00:39:35,333 --> 00:39:37,208 작고 연약한 피터 왓슨은 794 00:39:37,291 --> 00:39:40,250 얼굴엔 주근깨가 가득하고 알이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었다 795 00:39:40,333 --> 00:39:41,583 워낙 머리가 비상해서 796 00:39:41,666 --> 00:39:44,458 13살밖에 안 됐는데도 상급반에 다니고 있었다 797 00:39:44,541 --> 00:39:47,291 음악을 좋아했고 피아노도 잘 쳤으며 798 00:39:47,375 --> 00:39:49,875 게임은 잘 못 했지만 조용하고 예의 바른 아이였다 799 00:39:51,791 --> 00:39:55,041 덩치 큰 소년 둘이 작은 소년 쪽으로 다가갔다 800 00:39:57,041 --> 00:39:59,541 망원경을 눈에 댄 채 집중하고 있어서 801 00:39:59,625 --> 00:40:01,875 두 소년이 다가오는 건 보지 못했다 802 00:40:03,208 --> 00:40:05,583 '손 들어!' 어니가 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803 00:40:05,666 --> 00:40:07,250 피터 왓슨은 깜짝 놀랐다 804 00:40:09,250 --> 00:40:11,916 망원경 너머로 두 방해꾼을 바라보았다 805 00:40:12,000 --> 00:40:14,250 '야!' 어니가 소리쳤다 '손 들라니까!' 806 00:40:14,333 --> 00:40:15,666 피터 왓슨은 미동도 않고 807 00:40:15,750 --> 00:40:18,458 두 손으로 망원경을 꼭 쥐고 서 있었다 808 00:40:18,541 --> 00:40:20,291 레이먼드와 어니를 번갈아 보았다 809 00:40:20,375 --> 00:40:23,875 겁나진 않지만 저 두 바보에게 맞춰주는 게 낫다는 걸 잘 알았다 810 00:40:23,958 --> 00:40:26,500 몇 년 동안 그 둘의 관심을 듬뿍 받았으니까 811 00:40:26,583 --> 00:40:27,625 손 들어 812 00:40:27,708 --> 00:40:29,583 가장 현명한 대처였다 813 00:40:29,666 --> 00:40:32,500 레이먼드가 다가가 망원경을 채 갔다 814 00:40:32,583 --> 00:40:34,416 '누굴 훔쳐보는 거야?' 레이먼드가 쏘아붙였다 815 00:40:34,500 --> 00:40:36,708 피터 왓슨은 상황을 계산해 보았다 816 00:40:36,791 --> 00:40:39,500 냅다 도망쳐 봤자 금방 잡힐 것이고 817 00:40:39,583 --> 00:40:42,083 도와달라고 소릴 쳐봤자 아무도 못 들을 것이다 818 00:40:42,166 --> 00:40:46,708 남은 방법은 침착하게 말로 풀어보는 것뿐이었다 819 00:40:46,791 --> 00:40:49,041 '청딱따구리를 보고 있었어' 피터가 말했다 820 00:40:49,125 --> 00:40:49,958 '뭐라고?' 821 00:40:50,041 --> 00:40:52,666 '수컷 청딱따구리' 학명은 피쿠스 비리디스다 822 00:40:52,750 --> 00:40:55,750 '죽은 나무 둥치를 쪼면서 유충을 찾고 있더라고' 823 00:40:55,833 --> 00:40:57,833 '어디 있는데?' 어니가 총을 들며 물었다 824 00:40:57,916 --> 00:41:00,125 '내가 잡을 거야!' '못 잡아' 피터가 말하며 825 00:41:00,208 --> 00:41:03,208 레이먼드의 어깨 위 줄에 꿰인 새들을 보았다 826 00:41:03,291 --> 00:41:06,750 '형들이 소리 질러서 날아갔어 딱따구리는 겁이 많거든' 827 00:41:12,583 --> 00:41:14,416 레이먼드가 어니에게 뭐라고 속닥대니 828 00:41:14,500 --> 00:41:16,875 어니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829 00:41:16,958 --> 00:41:19,666 어니는 총을 내려놓고 작은 아이에게 다가가서는 830 00:41:19,750 --> 00:41:21,125 바닥에 쓰러뜨렸고 831 00:41:21,208 --> 00:41:24,000 레이먼드는 주머니에서 끈을 꺼내 길게 잘랐다 832 00:41:24,083 --> 00:41:26,208 둘은 피터의 손목을 꽁꽁 묶었다 833 00:41:26,291 --> 00:41:27,791 '다리도' 레이먼드가 말했다 834 00:41:27,875 --> 00:41:30,541 발버둥 치다가 배를 한 대 얻어맞은 피터는 835 00:41:30,625 --> 00:41:32,333 숨이 안 쉬어져서 그대로 누워 있었다 836 00:41:32,416 --> 00:41:36,375 두 소년은 요리할 닭을 준비하듯 피터의 발목까지 묶어버렸다 837 00:41:36,458 --> 00:41:37,916 어니는 총을 집어 들었고 838 00:41:38,000 --> 00:41:41,166 둘은 작은 소년을 들고 철로를 향해 갔다 839 00:41:41,250 --> 00:41:43,208 피터 왓슨은 한마디도 안 했다 840 00:41:43,291 --> 00:41:46,083 뭘 어쩌려는지 몰라도 말로는 해결 안 될 테니까 841 00:41:46,166 --> 00:41:49,958 둘은 철로 앞까지 아이를 끌고 가 철로 중간에 눕혔다 842 00:41:50,041 --> 00:41:51,166 바로 이 철로였다 843 00:41:53,166 --> 00:41:56,000 바로 이 철로에서 27년 전 내가 당한 일이다 844 00:41:56,083 --> 00:41:57,375 내 이름은 피터 왓슨이다 845 00:41:58,958 --> 00:42:00,541 '끈 더 줘' 어니가 말했다 846 00:42:04,625 --> 00:42:08,458 그 둘이 작업을 마쳤을 땐 피터는 철로에 꽁꽁 묶여 있었다 847 00:42:08,541 --> 00:42:11,208 머리와 발만 겨우 움직였다 848 00:42:11,291 --> 00:42:14,125 어니와 레이먼드는 물러나서 작품을 감상했다 849 00:42:14,208 --> 00:42:16,125 '아주 깔끔한데?' 어니가 말했다 850 00:42:16,208 --> 00:42:19,083 '이건 살인이야' 철로에 누운 소년이 말했다 851 00:42:19,166 --> 00:42:21,083 '꼭 그런 건 아니지' 어니가 말했다 852 00:42:21,166 --> 00:42:23,125 '기차 밑에 공간이 있을 수도 있잖아' 853 00:42:23,208 --> 00:42:25,875 '바닥에 납작하게 붙으면 살 수 있을지 몰라' 854 00:42:27,333 --> 00:42:30,750 둘은 경사면을 올라가 덤불 뒤에 앉았다 855 00:42:30,833 --> 00:42:32,958 어니가 담뱃갑을 꺼냈고 둘은 담배를 피웠다 856 00:42:33,041 --> 00:42:35,250 풀어줄 생각이 없음을 피터는 알고 있었다 857 00:42:35,333 --> 00:42:37,250 위험한 망나니들인 것이다 858 00:42:37,333 --> 00:42:39,791 위험하고 멍청한 망나니들 859 00:42:39,875 --> 00:42:42,625 '침착하게 생각해 보자' 피터가 중얼거렸다 860 00:42:42,708 --> 00:42:44,833 그대로 누워 상황을 파악했다 861 00:42:44,916 --> 00:42:46,791 머리에서 제일 높은 부분은 코였다 862 00:42:46,875 --> 00:42:50,541 코끝은 철로보다 대략 10cm쯤 올라와 있었다 863 00:42:50,625 --> 00:42:53,166 너무 높은가? 현대식 디젤 기관차라 알 수 없다 864 00:42:53,250 --> 00:42:56,333 철로의 가로대 사이 자갈 위에 머리를 대고 있으니 865 00:42:56,416 --> 00:42:58,041 조금 더 파고들어야 했다 866 00:42:58,750 --> 00:43:01,541 머리를 좌우로 움직여 자갈을 옆으로 밀어내니 867 00:43:01,625 --> 00:43:04,375 머리 아래 자갈 층이 조금씩 파였다 868 00:43:04,458 --> 00:43:07,833 결국 머리는 5cm쯤 낮췄으니 괜찮을 것 같은데 869 00:43:07,916 --> 00:43:08,833 발은 어쩐다? 870 00:43:08,916 --> 00:43:11,791 발가락 끝을 안쪽으로 모아 납작하게 눕힌 다음 871 00:43:11,875 --> 00:43:13,583 기차를 기다렸다 872 00:43:13,666 --> 00:43:17,250 어쩌면 기차 아래쪽에 진공 현상이 생겨서 873 00:43:17,333 --> 00:43:20,375 자기 몸을 빨아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874 00:43:20,458 --> 00:43:24,791 그렇다면 온 힘을 동원해서 몸을 땅에 최대한 붙여야만 했다 875 00:43:24,875 --> 00:43:28,666 '힘이 빠지면 안 돼 최대한 강하게 땅에 붙자' 876 00:43:28,750 --> 00:43:30,875 저 위의 하늘을 바라보니 877 00:43:30,958 --> 00:43:33,750 적운 하나가 오른쪽으로 천천히 떠 가고 있었다 878 00:43:33,833 --> 00:43:37,833 기체가 빨간색인 소형 하이윙 단엽기가 구름을 스쳐 갔다 879 00:43:37,916 --> 00:43:41,500 구식 파이퍼컵이네, 하며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880 00:43:42,083 --> 00:43:43,166 그런데 문득 881 00:43:43,250 --> 00:43:47,083 양쪽 레일에서 묘하게 웅웅대는 소리가 들렸다 882 00:43:47,166 --> 00:43:50,291 거의 안 들릴 만큼 작은 툭툭 치는 소리가 883 00:43:50,375 --> 00:43:52,916 먼 레일에서부터 들려오는 듯했다 884 00:43:58,916 --> 00:44:00,500 피터는 고개를 들어 885 00:44:00,583 --> 00:44:03,916 저 멀리까지 이어진 철로를 바라보았고 886 00:44:04,000 --> 00:44:04,958 기차가 보였다 887 00:44:05,041 --> 00:44:07,916 처음엔 검은 점 같았는데 바라보던 몇 초 사이에 888 00:44:08,000 --> 00:44:10,750 점이 점점 커지면서 윤곽이 생기더니 889 00:44:10,833 --> 00:44:15,291 곧 점이 아니라 커다랗고 네모난 증기 기관차의 앞모습으로 변했다 890 00:44:15,375 --> 00:44:17,625 피터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최대한 눌러서 891 00:44:17,708 --> 00:44:19,750 아까 파놓은 구덩이로 밀착시켰다 892 00:44:19,833 --> 00:44:21,291 발가락 끝을 모아 바닥에 붙이고 893 00:44:21,375 --> 00:44:24,333 눈을 꼭 감은 채 몸을 지면에 붙였다 894 00:44:24,416 --> 00:44:27,208 엄청난 굉음과 함께 기차가 들이닥쳤다 895 00:44:27,291 --> 00:44:28,916 머릿속에서 총이 발사된 듯했고 896 00:44:29,000 --> 00:44:31,625 엄청난 기세와 소리로 몰아치는 바람은 897 00:44:31,708 --> 00:44:35,041 허리케인처럼 콧구멍에서 허파까지 휘저어댔다 898 00:44:35,125 --> 00:44:37,833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과 숨 막히는 바람 899 00:44:37,916 --> 00:44:39,916 괴성을 지르는 식인 괴물이 900 00:44:40,000 --> 00:44:43,875 자신을 산 채로 입에 넣고 삼켜버린 것만 같았다 901 00:44:43,958 --> 00:44:46,083 그러다 모든 게 끝났다 기차가 지나간 것이다 902 00:44:46,791 --> 00:44:49,250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니 903 00:44:49,333 --> 00:44:51,833 커다란 흰 구름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다 904 00:44:51,916 --> 00:44:53,291 모두 끝났다 905 00:44:53,375 --> 00:44:54,375 견뎌낸 것이다 906 00:45:00,916 --> 00:45:02,583 - 풀어줘 - 어니가 말했다 907 00:45:02,666 --> 00:45:05,458 레이먼드는 피터를 철로에 묶었던 줄을 끊었다 908 00:45:05,541 --> 00:45:07,875 '발도 풀어줘, 손은 묶어두고' 909 00:45:07,958 --> 00:45:10,250 레이먼드는 발목을 묶은 줄을 끊었다 910 00:45:10,333 --> 00:45:13,375 '아직은 우리 포로야, 친구' 어니가 말했다 911 00:45:13,458 --> 00:45:17,416 덩치 큰 두 소년은 피터 왓슨을 데리고 호수로 향했다 912 00:45:17,500 --> 00:45:20,125 포로의 두 손은 앞으로 모아 묶인 채였다 913 00:45:20,208 --> 00:45:22,208 어니는 한쪽 손에 총을 들었고 914 00:45:22,291 --> 00:45:25,208 레이먼드는 피터에게 빼앗은 망원경을 들고 있었다 915 00:45:28,833 --> 00:45:30,250 길고 좁은 호숫가엔 916 00:45:30,333 --> 00:45:32,583 커다란 버드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917 00:45:32,666 --> 00:45:34,458 호수 한가운데는 깨끗했지만 918 00:45:34,541 --> 00:45:37,000 물가 쪽엔 골풀이 한가득이었다 919 00:45:37,083 --> 00:45:39,750 '좋아' 어니가 말했다 '이렇게 하자' 920 00:45:39,833 --> 00:45:43,291 '넌 얘 팔을, 난 다리를 잡고 셋을 센 다음' 921 00:45:43,375 --> 00:45:45,791 '저 골풀 숲 너머로 있는 힘껏 던지는 거야' 922 00:45:45,875 --> 00:45:48,500 '저기 봐!' 레이먼드가 끼어들었다 '저기 저놈을 잡자!' 923 00:45:48,583 --> 00:45:50,541 피터 왓슨도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924 00:45:50,625 --> 00:45:54,250 갈대와 골풀을 수면 위로 60cm쯤 쌓아 올려 만든 925 00:45:54,333 --> 00:45:55,791 둥지 하나가 보였다 926 00:45:55,875 --> 00:45:57,791 그곳엔 근사한 백조 한 마리가 927 00:45:57,875 --> 00:46:00,041 호수의 여신처럼 평온히 앉아 있었다 928 00:46:00,125 --> 00:46:03,583 백조는 경계하듯 주의 깊게 물가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929 00:46:03,666 --> 00:46:06,041 '맙소사!' 레이먼드가 외쳤다 '너무 예쁘잖아!' 930 00:46:06,125 --> 00:46:09,583 어니는 포로의 팔을 놓고 총을 들어 겨누었다 931 00:46:09,666 --> 00:46:13,166 '여… 여긴 조류 보호구역이야' 피터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932 00:46:13,250 --> 00:46:15,083 '뭐라고?' 어니가 물었다 933 00:46:15,166 --> 00:46:18,333 피터는 저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고 934 00:46:18,416 --> 00:46:20,125 차분하게 말하려 애썼다 935 00:46:20,208 --> 00:46:22,541 '백조는 잉글랜드 최고의 보호종 조류야' 936 00:46:22,625 --> 00:46:26,083 '둥지에 있을 땐 절대 쏘면 안 돼 새끼를 품고 있을지도 몰라' 937 00:46:26,166 --> 00:46:29,375 '그러지 마, 안 돼! 제발 그러지 마, 안 돼!' 938 00:46:30,958 --> 00:46:33,375 총알은 우아한 백조의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고 939 00:46:33,458 --> 00:46:36,375 길고 하얀 목이 둥지 옆으로 늘어졌다 940 00:46:46,666 --> 00:46:47,500 열어요 941 00:47:00,500 --> 00:47:02,875 '손 풀어줘, 레이먼드 사냥개 역할 시켜야지' 942 00:47:02,958 --> 00:47:05,833 레이먼드가 칼을 꺼내 소년의 손목을 묶은 줄을 끊었다 943 00:47:05,916 --> 00:47:07,000 '가져와' 944 00:47:07,083 --> 00:47:08,291 '싫어' 내가 말했다 945 00:47:09,125 --> 00:47:12,250 어니가 피터의 뺨을 세게 때렸고 946 00:47:12,333 --> 00:47:14,916 한쪽 콧구멍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947 00:47:15,000 --> 00:47:18,583 '한 번만 더 내 말 안 들으면 아주 본때를 보여주겠어!' 948 00:47:18,666 --> 00:47:23,208 '그 하얀 앞니를 위아래 몽땅 부러뜨릴 거야, 알겠냐?' 949 00:47:23,708 --> 00:47:24,666 피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950 00:47:24,750 --> 00:47:26,958 '대답해!' 어니가 왈왈댔다 '알아들었냐고!' 951 00:47:27,041 --> 00:47:29,708 '응' 피터가 조용히 말했다 '알아들었어' 952 00:47:30,583 --> 00:47:34,833 피터 왓슨은 눈물을 흘리며 호숫가로 가서 물에 들어갔다 953 00:47:34,916 --> 00:47:38,500 천천히 백조에게 다가가선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954 00:47:38,583 --> 00:47:42,041 둥지 중앙엔 회색 솜털로 뒤덮인 작은 새끼 백조 두 마리가 955 00:47:42,125 --> 00:47:44,416 서로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956 00:47:44,500 --> 00:47:46,750 '알 있냐?' 어니가 물가에서 소리쳤다 957 00:47:51,416 --> 00:47:53,791 '아니' 피터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어' 958 00:47:59,000 --> 00:48:01,666 피터는 백조를 안고 물가로 나와 959 00:48:01,750 --> 00:48:05,541 조심히 땅에 내려놓고 일어나서 두 소년을 마주 보았다 960 00:48:05,625 --> 00:48:08,833 눈물이 마르지 않은 두 눈에 분노가 불타올랐다 961 00:48:08,916 --> 00:48:11,333 '너희가 죽었어야 했어' 피터가 말했다 962 00:48:11,416 --> 00:48:14,833 어니는 잠시 움찔하는 듯하더니 곧장 정신을 차렸고 963 00:48:14,916 --> 00:48:18,000 그 작고 까만 눈동자에 위험한 불꽃이 일렁였다 964 00:48:20,291 --> 00:48:21,791 '칼 줘봐, 레이먼드' 965 00:48:24,416 --> 00:48:27,333 새의 날개와 몸이 만나는 곳엔 관절이 있는데 966 00:48:27,416 --> 00:48:30,916 어니는 그 관절을 찾아서는 칼로 그어 힘줄을 끊었다 967 00:48:31,000 --> 00:48:32,666 날카롭고 잘 드는 칼이라 968 00:48:32,750 --> 00:48:35,125 곧 한쪽 날개가 고스란히 떨어져 나왔다 969 00:48:35,208 --> 00:48:37,875 어니는 백조를 돌려놓고 반대편 날개도 자르더니 970 00:48:37,958 --> 00:48:40,458 '끈!'이라고 말하며 레이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971 00:48:43,000 --> 00:48:45,333 어니는 1m 길이의 끈을 8개 만들어서는 972 00:48:45,416 --> 00:48:48,791 커다란 날개 윗부분을 따라 하나씩 묶었다 973 00:48:48,875 --> 00:48:50,125 '팔 벌려' 974 00:48:53,416 --> 00:48:55,125 5월의 아름다운 아침 975 00:48:55,208 --> 00:48:57,500 햇살 가득한 호숫가에 서 있는 피터 왓슨 976 00:48:57,583 --> 00:48:59,916 피 묻은 커다란 날개가 977 00:49:00,000 --> 00:49:02,291 몸 양쪽으로 기괴하게 늘어져 있었다 978 00:49:02,375 --> 00:49:05,416 어니는 손뼉을 치더니 풀밭에서 지그를 추었다 979 00:49:12,416 --> 00:49:14,666 '끝났어?' 피터 왓슨이 물었다 980 00:49:14,750 --> 00:49:17,291 '백조는 말 못 하는데' 어니가 말했다 981 00:49:17,375 --> 00:49:21,375 세 사람은 호숫가를 따라가 커다란 버드나무 앞에 섰다 982 00:49:21,458 --> 00:49:23,916 저 높은 곳에서부터 늘어진 기다란 가지들이 983 00:49:24,000 --> 00:49:25,791 수면에 닿을 듯했다 984 00:49:26,875 --> 00:49:28,583 '할 일을 말해주지, 백조 군' 985 00:49:28,666 --> 00:49:30,750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986 00:49:30,833 --> 00:49:33,125 '날개를 펼치고 날아' 987 00:49:33,208 --> 00:49:35,041 '끝내주네!' 레이먼드가 외쳤다 988 00:49:35,125 --> 00:49:38,083 이 훌리건들을 벗어나 높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니 989 00:49:38,166 --> 00:49:39,708 피터는 매우 흡족했다 990 00:49:39,791 --> 00:49:41,875 일단 올라가면 안 내려올 작정이었다 991 00:49:41,958 --> 00:49:44,416 굳이 그 위까지 쫓아오진 않을 것 같았고 992 00:49:44,500 --> 00:49:45,541 혹시 올라오면 993 00:49:45,625 --> 00:49:49,125 두 사람 무게는 감당 못 할 가는 가지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994 00:49:49,208 --> 00:49:53,083 발을 디딜 낮은 가지들 덕에 올라가는 건 꽤 수월했다 995 00:49:53,166 --> 00:49:55,083 '더 높이!' 어니가 소리쳤다 '계속 올라가!' 996 00:49:55,166 --> 00:49:58,333 마침내 더 올라갈 곳이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 997 00:49:58,416 --> 00:50:01,458 남자 손목 정도 굵기의 가지에 올라섰는데 998 00:50:01,541 --> 00:50:05,833 호수 중앙 쪽으로 뻗은 다음 우아하게 늘어진 가지였다 999 00:50:05,916 --> 00:50:07,875 피터는 거기 서서 숨을 돌렸다 1000 00:50:07,958 --> 00:50:11,500 15m 이상 되는 높이인데 두 소년이 보이지 않았다 1001 00:50:11,583 --> 00:50:14,208 둘 다 나무 아래에 없었다 1002 00:50:14,291 --> 00:50:15,458 '내 말 잘 들어' 1003 00:50:15,541 --> 00:50:17,375 꼭대기의 작은 소년을 잘 보려고 1004 00:50:17,458 --> 00:50:20,791 나무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간 것이다 1005 00:50:20,875 --> 00:50:23,041 피터 왓슨은 그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1006 00:50:23,125 --> 00:50:26,125 버드나무 잎이 굉장히 성기고 가늘다는 걸 깨달았다 1007 00:50:26,208 --> 00:50:28,083 가림막 역할을 못 하는 것이다 1008 00:50:28,166 --> 00:50:30,125 '그 가지 끝으로 걸어가' 1009 00:50:30,208 --> 00:50:34,083 '그 걸쭉한 물 위까지 가서 날아오르는 거야!' 1010 00:50:34,166 --> 00:50:35,916 피터 왓슨은 움직이지 않았다 1011 00:50:36,000 --> 00:50:38,916 저 멀리 땅에 서 있는 두 형체를 바라보았다 1012 00:50:39,000 --> 00:50:41,458 두 사람은 가만히 서서 피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1013 00:50:41,541 --> 00:50:45,083 '열 셀 때까지 날개 펴고 날지 않으면' 1014 00:50:45,166 --> 00:50:46,541 '쏴버릴 줄 알아' 1015 00:50:46,625 --> 00:50:49,083 '그럼 하루에 백조를 두 마리나 잡는 거네' 1016 00:50:49,166 --> 00:50:50,541 '시작한다' 1017 00:50:50,625 --> 00:50:56,333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1018 00:50:56,416 --> 00:51:00,791 피터 왓슨은 그대로 서 있었다 누가 뭐래도 안 움직일 터였다 1019 00:51:00,875 --> 00:51:04,166 '일곱, 여덟, 아홉, 열' 1020 00:51:04,250 --> 00:51:08,166 피터 왓슨은 어니가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는 모습을 보았다 1021 00:51:08,250 --> 00:51:09,833 총이 발사되는 소리와 1022 00:51:09,916 --> 00:51:12,625 머리 옆을 휙 지나가는 총알 소리를 들었다 1023 00:51:16,000 --> 00:51:17,958 두렵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1024 00:51:18,041 --> 00:51:20,291 어니가 장전하는 모습이 보였다 1025 00:51:20,375 --> 00:51:23,500 '마지막 기회다!' 어니가 외쳤다 '다음엔 명중할 거야!' 1026 00:51:23,583 --> 00:51:24,416 피터는 기다렸다 1027 00:51:24,500 --> 00:51:27,083 저 멀리 미나리아재비 풀숲에서 1028 00:51:27,166 --> 00:51:30,916 또 다른 소년을 옆에 두고 선 한 소년이 또 다시 총을 겨누었다 1029 00:51:31,000 --> 00:51:34,291 이번에는 총알이 허벅지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1030 00:51:34,375 --> 00:51:37,083 아프진 않았지만 그 여파가 엄청났다 1031 00:51:37,166 --> 00:51:40,083 누군가 큰 망치로 다리를 내리친 듯한 충격에 1032 00:51:40,166 --> 00:51:42,875 가지를 딛고 있던 두 발이 균형을 잃었고 1033 00:51:42,958 --> 00:51:44,916 가지를 붙잡으려 허우적댔다 1034 00:51:45,000 --> 00:51:48,208 겨우 잡은 작은 가지는 구부러지더니 부러졌다 1035 00:51:57,375 --> 00:52:01,833 어떤 이들은 궁지에 몰려 더 감내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1036 00:52:01,916 --> 00:52:04,458 그대로 꺾이고 무너져 포기한다 1037 00:52:04,541 --> 00:52:06,666 하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아도 1038 00:52:06,750 --> 00:52:10,333 어째선지 절대로 꺾이지 않는 이들도 있다 1039 00:52:10,416 --> 00:52:13,666 그런 이들은 전쟁 중에도 평화로울 때도 눈에 띈다 1040 00:52:13,750 --> 00:52:15,791 불굴의 의지를 지닌 그들은 1041 00:52:15,875 --> 00:52:19,416 고통이나 고문에도 목숨이 위험해져도 1042 00:52:19,500 --> 00:52:21,083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1043 00:52:21,708 --> 00:52:24,166 어린 피터 왓슨도 그런 사람이었다 1044 00:52:24,250 --> 00:52:28,833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애쓰는 동안 1045 00:52:28,916 --> 00:52:32,708 자신이 이길 거라는 확신이 문득 찾아왔다 1046 00:52:32,791 --> 00:52:36,791 고개를 들어보니 호수에 밝은 빛이 물결치고 있었고 1047 00:52:36,875 --> 00:52:40,625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1048 00:52:40,708 --> 00:52:43,958 그 빛은 그를 손짓해 부르며 끌어당겼다 1049 00:52:44,041 --> 00:52:46,166 피터는 그 빛을 향해 몸을 던지며 1050 00:52:46,750 --> 00:52:48,083 두 날개를 활짝 폈다 1051 00:52:49,750 --> 00:52:53,625 그날 아침 마을 상공을 나는 거대한 백조를 봤다는 이가 1052 00:52:53,708 --> 00:52:54,875 세 명 있었다 1053 00:52:54,958 --> 00:52:55,958 교사 1054 00:52:56,041 --> 00:52:58,833 잡화점 지붕 타일을 교체하던 작업자 1055 00:52:58,916 --> 00:53:01,250 그리고 근처 들판에서 놀던 소년 1056 00:53:01,333 --> 00:53:04,333 왓슨의 어머니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1057 00:53:04,416 --> 00:53:06,250 문득 고갤 들어 창밖을 봤는데 1058 00:53:06,333 --> 00:53:09,125 바로 그 순간에 커다랗고 하얀 무언가가 1059 00:53:09,208 --> 00:53:11,958 하늘에서 떨어져 집 뒤뜰 잔디밭에 추락했다 1060 00:53:12,791 --> 00:53:14,458 급히 나가 보았다 1061 00:53:14,541 --> 00:53:18,416 그리고 쓰러져 있는 외동아들 옆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1062 00:53:19,250 --> 00:53:22,291 '우리 아가!' 그녀가 울부짖었다 '사랑하는 내 아들!' 1063 00:53:24,625 --> 00:53:25,875 '어쩌다 이렇게 됐니?' 1064 00:53:30,083 --> 00:53:33,958 "'백조'는 실제로 신문에 실렸던 사건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며" 1065 00:53:34,041 --> 00:53:37,750 "달은 이 이야기를 30년간 '아이디어 북'에 간직했다가" 1066 00:53:37,833 --> 00:53:40,000 "1976년 10월에 집필했다" 1067 00:53:46,583 --> 00:53:52,833 "쥐잡이 사내" 1068 00:53:52,916 --> 00:53:59,875 "오늘의 뉴스" 1069 00:54:01,166 --> 00:54:04,375 쥐잡이 사내가 주유소에 도착한 것은 오후였다 1070 00:54:04,458 --> 00:54:07,375 조용조용 발소리 하나 없이 진입로로 들어섰다 1071 00:54:07,458 --> 00:54:09,791 자갈을 밟는데도 소리가 전혀 안 났다 1072 00:54:09,875 --> 00:54:12,458 한쪽 어깨엔 군용 가방을 멨고 1073 00:54:12,541 --> 00:54:15,208 커다란 주머니가 달린 구식 코듀로이 재킷에 1074 00:54:15,291 --> 00:54:18,958 코듀로이 바지는 무릎 부분이 흰색 끈으로 동여매져 있었다 1075 00:54:19,041 --> 00:54:20,125 - 계십니까? - 네 1076 00:54:20,208 --> 00:54:21,083 설치류 처리반입니다 1077 00:54:21,166 --> 00:54:23,916 작고 까만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1078 00:54:24,000 --> 00:54:25,208 - 쥐 잡으러 오셨군요 - 맞습니다 1079 00:54:25,291 --> 00:54:27,458 탄탄한 몸, 거친 피부, 긴 얼굴 1080 00:54:27,541 --> 00:54:31,291 누런 앞니 두 개가 길게 뻗어 아랫입술을 덮었다 1081 00:54:31,375 --> 00:54:34,333 얇고 둥근 귀는 거의 뒤통수까지 뻗어 있었다 1082 00:54:34,416 --> 00:54:36,000 눈동자는 검은색에 가까웠지만 1083 00:54:36,083 --> 00:54:39,083 사람을 볼 때면 안쪽엔 노란 기가 돌았다 1084 00:54:39,166 --> 00:54:41,666 - 빨리 오셨네요 - 보건국 특별 지시가 있어서요 1085 00:54:41,750 --> 00:54:43,958 보건국이요? 쥐를 다 잡을 겁니까? 1086 00:54:44,041 --> 00:54:44,958 - 그렇죠 - 어떻게요? 1087 00:54:45,041 --> 00:54:45,875 궁금하네요 1088 00:54:45,958 --> 00:54:49,166 쥐의 종류와 위치에 따라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1089 00:54:49,250 --> 00:54:50,541 - 덫을 놓겠죠? - 네? 1090 00:54:50,625 --> 00:54:51,541 - 덫이요 - 덫이요? 1091 00:54:51,625 --> 00:54:52,541 쥐잡이가 코웃음을 쳤다 1092 00:54:52,625 --> 00:54:54,666 그렇겐 못 잡아요 쥐가 토끼도 아니고 1093 00:54:54,750 --> 00:54:56,000 쥐잡이는 고개를 쳐들더니 1094 00:54:56,083 --> 00:54:59,708 코를 좌우로 실룩대며 냄새를 맡았다 1095 00:54:59,791 --> 00:55:02,666 쥐는 영리합니다 잡으려면 파악부터 해야죠 1096 00:55:03,250 --> 00:55:04,916 이 일을 하려면 쥐를 잘 알아야 해요 1097 00:55:09,208 --> 00:55:11,541 쥐들은 사람을 지켜봅니다 1098 00:55:11,625 --> 00:55:15,333 쥐를 박멸하려고 준비하는 내내 사람을 지켜보죠 1099 00:55:15,416 --> 00:55:17,208 하수관 작업은 아니겠죠? 1100 00:55:17,291 --> 00:55:18,875 하수관은 아닙니다 1101 00:55:18,958 --> 00:55:21,416 - 하수관 작업은 까다롭죠 - 안 그럴 것 같은데요 1102 00:55:21,500 --> 00:55:24,583 그렇게 생각하신다? 직접 해보시면 알겠죠 1103 00:55:24,666 --> 00:55:27,333 어떤 전략으로 접근하실지 궁금해지네요 1104 00:55:27,416 --> 00:55:28,583 약을 쓰겠죠 1105 00:55:28,666 --> 00:55:30,833 약을 어디에 놓을 겁니까? 1106 00:55:30,916 --> 00:55:31,750 하수관에 풀겠죠 1107 00:55:31,833 --> 00:55:33,333 사내의 얼굴이 승리감으로 빛났다 1108 00:55:33,416 --> 00:55:35,125 역시 하수관에 풀겠다? 1109 00:55:35,208 --> 00:55:37,541 그럼 어떻게 될까요? 싹 쓸려 내려갑니다 1110 00:55:37,625 --> 00:55:39,541 약이 싹 사라져요 하수관은 강 같거든요 1111 00:55:39,625 --> 00:55:42,791 그럼 박멸 전문가께서는 어떻게 하실까요? 1112 00:55:42,875 --> 00:55:44,666 사내는 한 걸음 다가서서는 1113 00:55:44,750 --> 00:55:46,916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목소리로 1114 00:55:47,000 --> 00:55:49,625 대단한 영업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듯 말했다 1115 00:55:49,708 --> 00:55:52,833 쥐가 뭐든 갉아댄다는 건 아시죠? 1116 00:55:52,916 --> 00:55:55,375 뭐든 일단 갉아대고 보죠 1117 00:55:55,458 --> 00:55:58,500 하수구의 쥐를 잡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느냐? 1118 00:55:58,583 --> 00:56:01,416 그의 목소리는 꾸룩대는 개구리 소리 같았고 1119 00:56:01,500 --> 00:56:04,583 입에 침이 고이기라도 한 듯 한 마디 한 마디를 하는 모습이 1120 00:56:04,666 --> 00:56:06,625 마치 음미하는 듯했다 1121 00:56:06,708 --> 00:56:10,333 평범한 종이봉투를 들고 하수구로 들어갑니다 1122 00:56:10,416 --> 00:56:13,083 봉투에는 오로지 석고 가루만 들어 있죠 1123 00:56:13,166 --> 00:56:15,500 하수구 천장에 봉투를 매달아 1124 00:56:15,583 --> 00:56:18,291 물에 닿지 않을 정도로 드리워야 해요 1125 00:56:18,375 --> 00:56:20,041 쥐의 앞발이 닿을 정도로만요 1126 00:56:20,125 --> 00:56:21,541 클로드는 넋 나간 듯 들었다 1127 00:56:21,625 --> 00:56:26,291 헤엄쳐 오던 늙은 쥐 한 마리가 봉투를 보고 멈춥니다 1128 00:56:26,375 --> 00:56:28,500 킁킁대 보니 냄새가 나쁘지 않자 1129 00:56:28,583 --> 00:56:30,083 - 어떻게 할까요? - 갉아대겠죠 1130 00:56:30,166 --> 00:56:33,125 맞아요, 쥐가 갉아대면 봉투가 찢어지고 1131 00:56:33,208 --> 00:56:36,625 쥐는 노력의 대가로 입안 가득 석고 가루를 얻겠죠 1132 00:56:36,708 --> 00:56:37,541 그다음엔요? 1133 00:56:37,625 --> 00:56:38,916 끝나는 거죠 1134 00:56:39,625 --> 00:56:41,041 - 죽는다고요? - 꼴까닥합니다 1135 00:56:41,125 --> 00:56:43,375 - 석고 가루에? - 젖으면 부풀잖아요 1136 00:56:43,458 --> 00:56:45,666 목구멍에 들어가자마자 부풀어 오르고 1137 00:56:45,750 --> 00:56:48,291 무엇보다 빠르게 쥐를 죽입니다 1138 00:56:48,375 --> 00:56:50,083 이래서 쥐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니까요 1139 00:56:50,166 --> 00:56:52,208 남자는 우쭐함에 얼굴을 빛내며 1140 00:56:52,291 --> 00:56:56,208 지저분한 두 손을 모으더니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1141 00:56:57,791 --> 00:57:00,166 자, 쥐들은 어디 있나요? 1142 00:57:00,250 --> 00:57:03,041 '쥐'라는 단어가 얼마나 기름지고 질척한지 1143 00:57:03,125 --> 00:57:04,916 녹인 버터로 가글하는 듯했다 1144 00:57:05,000 --> 00:57:06,583 저 길 건너편 건초더미에요 1145 00:57:06,666 --> 00:57:09,041 - 실내엔 없고요? - 건초더미에만 있어요 1146 00:57:09,125 --> 00:57:13,541 실내에도 있을 겁니다 음식을 깔짝대며 병을 퍼뜨리겠죠 1147 00:57:13,625 --> 00:57:16,875 - 병이 돌진 않습니까? - 나와 클로드를 차례로 쳐다봤다 1148 00:57:16,958 --> 00:57:18,458 - 아픈 사람은 없어요 - 확실한가요? 1149 00:57:18,541 --> 00:57:20,166 - 확실합니다 - 모르는 일이죠 1150 00:57:20,250 --> 00:57:23,000 보건국 직원의 탈을 쓰고선 1151 00:57:23,083 --> 00:57:25,833 림프절 페스트가 돌지 않는다는 말에 실망했다 1152 00:57:25,916 --> 00:57:29,416 어쨌든 건초더미에 쥐들이 있는데 어떻게 없앨 겁니까? 1153 00:57:29,500 --> 00:57:31,750 사내는 이를 드러내며 교활한 웃음을 짓더니 1154 00:57:31,833 --> 00:57:34,250 가방에서 커다란 양철통을 꺼내 들고는 1155 00:57:34,333 --> 00:57:36,750 무게를 재듯 위아래로 움직이며 말했다 1156 00:57:36,833 --> 00:57:39,208 특별하고 치명적인 약입니다 1157 00:57:39,291 --> 00:57:42,958 아주 조금만 갖고 있다가 걸려도 6개월은 감옥에서 썩을 겁니다 1158 00:57:43,041 --> 00:57:45,250 이 정도 양이면 백만 명을 죽일 수 있어요 1159 00:57:45,333 --> 00:57:46,666 - 보실래요? - 보여주세요 1160 00:57:46,750 --> 00:57:48,916 사내는 동전을 꺼내 지렛대 삼아 뚜껑을 열었다 1161 00:57:49,000 --> 00:57:49,833 이것 좀 보세요 1162 00:57:49,916 --> 00:57:53,500 사랑스럽다는 듯 깡통을 들어 클로드에게 보여줬다 1163 00:57:53,583 --> 00:57:55,125 옥수수인가요, 보리인가요? 1164 00:57:55,208 --> 00:57:57,583 치명적인 약을 잔뜩 머금은 귀리입니다 1165 00:57:57,666 --> 00:58:01,333 한 알만 입에 넣어도 3분 안에 저세상행이죠 1166 00:58:01,416 --> 00:58:03,458 이 통은 각별히 보관합니다 1167 00:58:03,541 --> 00:58:05,875 그가 통을 소중히 감싸 쥐고 살짝 흔들자 1168 00:58:06,791 --> 00:58:09,000 귀리 알갱이들이 바스락거렸다 1169 00:58:09,083 --> 00:58:12,375 하지만 오늘은 안 줄 겁니다 줘 봤자 안 먹을 거거든요 1170 00:58:12,458 --> 00:58:16,750 그게 쥐의 습성이죠 극도로 의심이 많아요 1171 00:58:16,833 --> 00:58:19,375 오늘은 깨끗하고 맛있는 귀리를 줄 겁니다 1172 00:58:19,458 --> 00:58:22,750 어떤 해도 끼치지 않겠죠 기껏해야 살찌는 정도려나 1173 00:58:22,833 --> 00:58:26,541 내일도 똑같이 할 겁니다 그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1174 00:58:26,625 --> 00:58:31,083 귀리 맛이 좋다고 소문나서 곧 온 동네 쥐들이 모여들겠죠 1175 00:58:31,166 --> 00:58:32,000 영리하네요 1176 00:58:32,083 --> 00:58:34,958 이 일을 하려면 쥐보다 영리해야 합니다 1177 00:58:35,041 --> 00:58:36,500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죠 1178 00:58:36,583 --> 00:58:38,000 '아예 쥐가 돼야겠네요' 1179 00:58:38,083 --> 00:58:40,625 생각할 틈도 없이 그냥 튀어나와 버렸다 1180 00:58:40,708 --> 00:58:43,333 사내를 보고 있자니 그 말을 참을 수가 없었다 1181 00:58:43,416 --> 00:58:45,166 그런데 반응이 놀라웠다 1182 00:58:45,250 --> 00:58:46,208 - 맞아요! - 그가 외쳤다 1183 00:58:46,291 --> 00:58:48,083 진짜 제대로 이해하셨군요 1184 00:58:48,166 --> 00:58:51,458 훌륭한 쥐 박멸 전문가라면 누구보다 쥐와 닮아야 하고 1185 00:58:51,541 --> 00:58:55,583 쥐보다 영리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1186 00:58:56,750 --> 00:58:58,208 바쁘니까 시작해야겠네요 1187 00:58:58,291 --> 00:59:01,500 레이디 리어노라 벤슨이 저택에 빨리 와달라고 해서요 1188 00:59:01,583 --> 00:59:02,666 거기도 쥐가 있답니까? 1189 00:59:02,750 --> 00:59:04,583 쥐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1190 00:59:04,666 --> 00:59:06,958 쥐잡이 사내는 진입로를 천천히 걸어갔다 1191 00:59:07,041 --> 00:59:09,875 걸음걸이가 놀라울 만큼 쥐랑 똑같았다 1192 00:59:09,958 --> 00:59:13,541 무릎의 탄성을 이용한 느긋하면서 섬세한 걸음 1193 00:59:13,625 --> 00:59:15,958 자갈을 밟는데 소리 한번 나지 않았다 1194 00:59:16,625 --> 00:59:18,541 그는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더니 1195 00:59:18,625 --> 00:59:22,333 건초더미 주위를 빠르게 돌며 귀리 몇 줌을 땅에 뿌렸다 1196 00:59:22,416 --> 00:59:25,000 다음 날 다시 와서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1197 00:59:25,083 --> 00:59:28,000 그다음 날에도 왔고 또 그다음 날에도 왔다 1198 00:59:28,083 --> 00:59:31,416 그리고 드디어 나흘째에 약에 적신 귀리가 등장했다 1199 00:59:31,500 --> 00:59:33,083 그런데 이번엔 뿌리지 않고 1200 00:59:33,166 --> 00:59:36,375 건초더미 주위 몇 군데에 한 무더기씩 두었다 1201 00:59:39,291 --> 00:59:40,958 - 개가 있습니까? - 네 1202 00:59:41,041 --> 00:59:44,916 개가 끔찍하게 죽길 바라지 않으면 울타리 못 넘어오게 하세요 1203 00:59:45,000 --> 00:59:47,083 다음 날 사체를 수거하러 왔다 1204 00:59:47,166 --> 00:59:49,875 죽은 쥐 좀 넣게 낡은 자루 하나 주십쇼 1205 00:59:49,958 --> 00:59:53,458 득의양양한 태도로 검은 눈동자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1206 00:59:53,541 --> 00:59:56,791 이제 곧 대단한 성과를 선보일 참인 것이다 1207 00:59:56,875 --> 00:59:59,750 클로드가 자루를 가져왔고 다 같이 길 건너편으로 갔다 1208 00:59:59,833 --> 01:00:01,541 사내는 건초더미 주변을 돌며 1209 01:00:01,625 --> 01:00:04,416 몸을 숙여 독약 귀리 무더기를 들여다보았다 1210 01:00:04,500 --> 01:00:06,375 - 뭔가 이상하네 - 그가 중얼거렸다 1211 01:00:06,458 --> 01:00:07,916 낮은 목소리에 화가 가득했다 1212 01:00:08,000 --> 01:00:11,458 다른 귀리 무더기 쪽으로 가더니 엎드려서 자세히 들여다봤다 1213 01:00:11,541 --> 01:00:13,958 - 뭔가 단단히 잘못됐어 - 왜 그래요? 1214 01:00:14,041 --> 01:00:17,125 대답은 없었지만 쥐들이 미끼를 건드리지 않은 건 분명해 보였다 1215 01:00:17,208 --> 01:00:19,333 '쥐들이 엄청 영리한가 봅니다' 내가 말했다 1216 01:00:19,416 --> 01:00:22,666 그는 내 말에 짜증이 났고 얼굴과 코에 감정이 드러났으며 1217 01:00:22,750 --> 01:00:26,125 누런 앞니 두 개는 아랫입술을 파고들 듯했다 1218 01:00:26,208 --> 01:00:28,708 - 헛소리하지 마쇼 - 그가 날 보며 말했다 1219 01:00:28,791 --> 01:00:31,625 쥐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서 뭘 먹고 온 겁니다 1220 01:00:31,708 --> 01:00:34,458 맛난 먹이를 배부르게 먹은 거예요 1221 01:00:34,541 --> 01:00:38,625 배가 터질 듯 부르지 않고서야 귀리를 마다할 쥐는 없어요 1222 01:00:38,708 --> 01:00:40,333 쥐잡이 사내는 시무룩하게 돌아섰다 1223 01:00:40,416 --> 01:00:43,916 무릎을 꿇고 앉아 모종삽으로 독약 귀리를 푸더니 1224 01:00:44,000 --> 01:00:46,166 조심스럽게 깡통에 담았다 1225 01:00:46,250 --> 01:00:49,833 작업이 끝난 후, 우리 셋은 다시 길을 건너 돌아왔다 1226 01:00:50,916 --> 01:00:52,791 주유기 옆에 선 쥐잡이 사내는 1227 01:00:52,875 --> 01:00:54,791 침울하고 초라해 보였고 1228 01:00:54,875 --> 01:00:57,541 얼굴에 음울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1229 01:00:57,625 --> 01:01:01,416 실패감에 위축된 듯했고 속 모를 눈동자는 음산했다 1230 01:01:01,500 --> 01:01:04,750 누런 앞니 한쪽 옆으로 혀를 살짝 내밀었다 1231 01:01:04,833 --> 01:01:08,000 음침한 눈길로 나를 한 번 보고 클로드를 돌아보았다 1232 01:01:08,083 --> 01:01:10,083 코끝을 씰룩이며 냄새를 맡고 1233 01:01:10,166 --> 01:01:13,208 발뒤꿈치를 들었다 놨다 하며 천천히 몸을 흔들더니 1234 01:01:13,291 --> 01:01:15,833 조용하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1235 01:01:15,916 --> 01:01:17,250 뭐 하나 보여드릴까? 1236 01:01:17,333 --> 01:01:19,625 실추된 명예를 되찾으려는 게 분명했다 1237 01:01:19,708 --> 01:01:21,791 - 뭔데요? - 굉장한 거 보여드려요? 1238 01:01:21,875 --> 01:01:24,916 오른손을 재킷의 건빵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더니 1239 01:01:25,000 --> 01:01:28,541 살아 있는 커다란 쥐를 꺼냈는데 두 손가락으로 꽉 움켜쥔 채였다 1240 01:01:28,625 --> 01:01:29,541 맙소사! 1241 01:01:30,208 --> 01:01:31,166 굉장하지요? 1242 01:01:31,250 --> 01:01:34,625 몸을 움츠리고 목을 길게 뺀 채 능글맞은 얼굴로 우릴 보며 1243 01:01:34,708 --> 01:01:36,916 커다란 갈색 쥐를 들고 있는데 1244 01:01:37,000 --> 01:01:40,000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듯 쥐의 목을 잡고 1245 01:01:40,083 --> 01:01:42,416 고개 돌려 물지 못하게 단단히 틀어쥐었다 1246 01:01:42,500 --> 01:01:44,333 주머니에 쥐를 넣고 다닙니까? 1247 01:01:44,416 --> 01:01:46,375 쥐 한두 마리쯤은 늘 지니고 다니지요 1248 01:01:46,458 --> 01:01:50,000 다른 손을 다른 주머니에 넣더니 꺼내 든 것은 작고 하얀… 1249 01:01:50,083 --> 01:01:52,625 - 페럿입니까? - 사내는 쇳소리를 내며 킥킥댔다 1250 01:01:52,708 --> 01:01:55,416 페럿은 주인을 알아보는 듯 손안에서 얌전히 있었다 1251 01:01:55,500 --> 01:01:57,791 페럿은 누구보다 빠르게 쥐를 죽이지요 1252 01:01:57,875 --> 01:02:00,125 그리고는 두 짐승 사이의 거리를 좁혔고 1253 01:02:00,208 --> 01:02:03,458 이제 페럿의 코와 쥐의 얼굴은 15c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1254 01:02:03,541 --> 01:02:06,125 페럿의 핑크빛 눈이 쥐를 노려보았다 1255 01:02:06,208 --> 01:02:08,916 쥐는 천적에게서 멀어지려 발버둥을 쳤다 1256 01:02:09,000 --> 01:02:10,125 - 자 - 사내가 말했다 1257 01:02:10,208 --> 01:02:11,041 잘 봐요 1258 01:02:13,041 --> 01:02:15,166 카키색 셔츠의 단추가 두어 개 풀려 있었는데 1259 01:02:15,250 --> 01:02:18,625 맨살뿐인 셔츠 안으로 쥐를 집어넣었다 1260 01:02:18,708 --> 01:02:21,625 벨트 때문에 쥐는 허리 아래로 내려갈 수 없었다 1261 01:02:21,708 --> 01:02:23,291 그다음엔 페럿을 집어넣었다 1262 01:02:23,375 --> 01:02:26,250 셔츠 안에서는 소동이 일어났다 1263 01:02:26,333 --> 01:02:29,916 쥐가 페럿을 피하려고 사내의 몸을 둘러 달리는 듯했다 1264 01:02:30,000 --> 01:02:33,750 6, 7바퀴를 도는 동안 작은 덩어리와 큰 덩어리 사이가 1265 01:02:33,833 --> 01:02:36,916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더니 1266 01:02:37,000 --> 01:02:39,625 결국 두 덩어리가 하나가 되는 듯 보였고 1267 01:02:39,708 --> 01:02:42,416 실랑이가 벌어졌으며 날카로운 비명이 이어졌다 1268 01:02:42,500 --> 01:02:45,666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사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1269 01:02:45,750 --> 01:02:47,958 두 다리를 벌리고 두 팔은 살짝 늘어뜨린 채 1270 01:02:48,041 --> 01:02:51,083 클로드의 얼어붙은 얼굴을 까만 눈동자로 주시했다 1271 01:02:51,958 --> 01:02:55,666 마침내 셔츠 깊숙이 손을 집어넣어 1272 01:02:55,750 --> 01:02:57,416 페럿을 꺼냈고 1273 01:02:57,500 --> 01:02:59,875 다른 손으로는 죽은 쥐를 꺼냈다 1274 01:02:59,958 --> 01:03:03,166 페럿의 하얀 주둥이엔 피가 묻어 있었다 1275 01:03:04,416 --> 01:03:06,708 '유쾌한 광경은 아니네요' 내가 말했다 1276 01:03:06,791 --> 01:03:09,708 이런 광경은 전에 본 적 없겠죠 1277 01:03:09,791 --> 01:03:11,083 대체로 그렇죠 1278 01:03:11,166 --> 01:03:13,833 계속 그러다가는 결국 배를 물릴 겁니다 1279 01:03:13,916 --> 01:03:16,166 하지만 클로드는 분명 흥미로워했고 1280 01:03:16,250 --> 01:03:17,750 사내는 다시 우쭐해졌다 1281 01:03:17,833 --> 01:03:19,958 더 굉장한 걸 보여드릴까? 1282 01:03:20,041 --> 01:03:23,125 직접 보지 않고는 절대 못 믿을 모습을요 1283 01:03:23,208 --> 01:03:25,750 나는 꽤나 걱정이 돼서 클로드를 흘끗 봤다 1284 01:03:27,791 --> 01:03:28,625 그럽시다 1285 01:03:29,375 --> 01:03:32,833 사내는 죽은 쥐를 한쪽 주머니에 페럿을 다른 주머니에 넣었다 1286 01:03:32,916 --> 01:03:36,833 그러더니 가방을 뒤져 두 번째 살아 있는 쥐를 꺼냈다 1287 01:03:36,916 --> 01:03:37,750 이런, 맙소사! 1288 01:03:37,833 --> 01:03:40,208 늘 한두 마리쯤은 갖고 다닌다니까요 1289 01:03:40,291 --> 01:03:42,125 이 일을 하려면 쥐를 잘 알아야 하고 1290 01:03:42,208 --> 01:03:44,625 그러려면 늘 곁에 둬야 하니까요 1291 01:03:44,708 --> 01:03:48,291 이놈은 늙은 시궁쥐인데 지독하게 영리한 놈입니다 1292 01:03:48,375 --> 01:03:51,916 이번엔 뭘 하려나, 하며 날 바라보곤 하지요 1293 01:03:52,000 --> 01:03:53,333 - 보이죠? - 매우 불쾌한 광경이다 1294 01:03:53,416 --> 01:03:54,875 '어쩔 셈인가요?' 내가 물었다 1295 01:03:54,958 --> 01:03:58,083 좀 전의 공연보다 더 별로일 듯한 느낌이 들었다 1296 01:03:58,166 --> 01:04:01,250 - 끈 하나만 주시지요 - 클로드가 끈을 하나 줬고 1297 01:04:01,333 --> 01:04:03,708 사내는 쥐의 한쪽 뒷다리를 묶었다 1298 01:04:03,791 --> 01:04:06,583 쥐가 발버둥쳤지만 손아귀에서 꼼짝 못 했다 1299 01:04:06,666 --> 01:04:08,208 안에 탁자가 있습니까? 1300 01:04:08,291 --> 01:04:10,250 '실내엔 못 들입니다' 내가 말했다 1301 01:04:10,333 --> 01:04:12,708 탁자든 뭐든 평평한 게 필요합니다 1302 01:04:12,791 --> 01:04:16,041 우린 주유기 쪽으로 갔고 사내는 시궁쥐를 그 위에 올려놨다 1303 01:04:16,125 --> 01:04:19,625 그리고 쥐가 도망 못 가도록 기둥에 줄을 묶었다 1304 01:04:19,708 --> 01:04:22,166 쥐는 웅크린 채 미동도 않고 경계했다 1305 01:04:22,250 --> 01:04:24,500 커다란 회색 쥐는 검은 눈동자를 빛냈고 1306 01:04:24,583 --> 01:04:28,083 비늘로 덮인 긴 꼬리는 철제 주유기 위에 늘어져 있었다 1307 01:04:28,166 --> 01:04:29,750 쥐는 사내에게서 눈을 거뒀지만 1308 01:04:29,833 --> 01:04:32,333 어쩌려는지 살피듯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1309 01:04:32,416 --> 01:04:36,083 사내가 몇 발짝 물러서자 쥐는 곧장 긴장을 풀었다 1310 01:04:36,166 --> 01:04:39,875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더니 가슴의 회색 털을 핥기 시작했다 1311 01:04:39,958 --> 01:04:42,500 그러고는 양쪽 앞발로 주둥이를 긁었다 1312 01:04:42,583 --> 01:04:45,791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겐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1313 01:04:45,875 --> 01:04:48,250 - 내기 하나 할까요? - 사내가 말했다 1314 01:04:48,333 --> 01:04:49,791 '됐습니다' 내가 말했다 1315 01:04:49,875 --> 01:04:53,125 - 내기하면 더 재밌을 텐데요 - 무슨 내기를 하게요? 1316 01:04:53,208 --> 01:04:56,166 손을 쓰지 않고 저 쥐를 죽여보겠습니다 1317 01:04:56,250 --> 01:04:58,375 손은 주머니에 넣고 있죠 1318 01:04:58,458 --> 01:05:01,166 돈을 좀 벌어보겠다는 심산이 분명했다 1319 01:05:01,250 --> 01:05:04,541 곧 죽을 쥐를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 1320 01:05:04,625 --> 01:05:06,541 쥐가 죽을 거라는 사실보다는 1321 01:05:06,625 --> 01:05:09,083 특별한 방식으로 죽을 거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1322 01:05:09,166 --> 01:05:11,291 그것도 아주 잔혹하게 1323 01:05:11,375 --> 01:05:13,375 - 발로 차려고요? - 발도 안 씁니다 1324 01:05:13,458 --> 01:05:15,916 - 팔은요 - 팔, 다리, 손, 다 안 써요 1325 01:05:16,000 --> 01:05:17,500 - 깔고 앉으려나? - 안 뭉갭니다 1326 01:05:17,583 --> 01:05:19,500 - 어디 봅시다 - 우선 1파운드 거시죠 1327 01:05:19,583 --> 01:05:21,416 어림없는 소리, 내가 왜요? 1328 01:05:21,500 --> 01:05:23,125 - 얼마나 걸 겁니까? - 안 걸어요 1329 01:05:23,208 --> 01:05:25,083 그럼 관둡시다 1330 01:05:25,166 --> 01:05:27,500 - 사내는 끈을 푸는 시늉을 했다 - 1실링 걸죠 1331 01:05:27,583 --> 01:05:29,583 속이 아까보다 더 울렁거렸지만 1332 01:05:29,666 --> 01:05:32,291 이 모든 상황엔 묘하게 자석 같은 힘이 있었고 1333 01:05:32,375 --> 01:05:34,791 나는 그 자리를 뜨긴커녕 움직일 수도 없었다 1334 01:05:34,875 --> 01:05:35,833 - 댁도 할 거요? - 아뇨 1335 01:05:35,916 --> 01:05:37,625 1실링에 이걸 하라고요? 1336 01:05:37,708 --> 01:05:39,666 - 하라곤 안 했는데요 - 돈은요? 1337 01:05:39,750 --> 01:05:41,541 클로드가 주유기 위에 1실링을 올려놨고 1338 01:05:41,625 --> 01:05:44,416 사내는 클로드의 돈 옆에 6펜스 동전 두 개를 놓았다 1339 01:05:44,500 --> 01:05:45,333 내기하는 겁니다 1340 01:05:45,416 --> 01:05:48,000 클로드와 나는 물러섰고 사내는 앞으로 다가섰다 1341 01:05:48,083 --> 01:05:51,833 두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상체를 쥐 쪽으로 기울였다 1342 01:05:51,916 --> 01:05:53,500 쥐가 경계하며 웅크렸다 1343 01:05:53,583 --> 01:05:56,166 사내에게 달려들려는 듯하더니 1344 01:05:56,250 --> 01:05:57,958 이내 물러나기 시작했다 1345 01:05:58,041 --> 01:06:00,416 웅크린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나다 보니 1346 01:06:00,500 --> 01:06:02,625 뒷다리에 묶은 줄이 팽팽해졌다 1347 01:06:02,708 --> 01:06:04,833 사내는 쥐 쪽으로 몸을 더 기울였다 1348 01:06:04,916 --> 01:06:07,500 까만 눈으로 쥐를 지켜보는데 갑자기… 1349 01:06:07,583 --> 01:06:10,208 - 쥐가 발작했다 - 쥐가 발작하며 몸을 날렸다 1350 01:06:13,083 --> 01:06:16,708 줄이 확 당겨지면서 다리가 탈골 직전까지 갔다 1351 01:06:16,791 --> 01:06:20,166 쥐는 줄이 닿는 한 최대한 멀리 주유기 끝으로 기어갔다 1352 01:06:20,250 --> 01:06:23,208 수염이 떨리고 긴 회색 몸뚱이는 두려움에 굳었다 1353 01:06:23,291 --> 01:06:26,666 그러자 사내는 아주 천천히 상체를 움직여 1354 01:06:26,750 --> 01:06:27,875 더 가까이 다가갔다 1355 01:06:27,958 --> 01:06:31,083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1356 01:06:31,166 --> 01:06:34,666 몹시 불쾌한 일이 벌어질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1357 01:06:34,750 --> 01:06:38,208 악랄하고 잔인한 광경을 봐야만 하는 것이다 1358 01:06:38,291 --> 01:06:41,583 두 얼굴 사이의 거리가 한 뼘 정도로 좁혀졌다 1359 01:06:41,666 --> 01:06:44,375 잔뜩 겁먹고 긴장한 쥐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1360 01:06:44,458 --> 01:06:45,833 쥐잡이 사내 역시 긴장했지만 1361 01:06:45,916 --> 01:06:49,416 잔뜩 당겨 놓은 용수철처럼 위험하고 적극적인 긴장감이었다 1362 01:06:49,500 --> 01:06:52,041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1363 01:06:52,125 --> 01:06:53,958 그러다 갑자기 달려들었다 1364 01:06:54,041 --> 01:06:55,083 마치 뱀이 공격하듯 1365 01:06:55,166 --> 01:06:57,916 칼을 날리듯 빠르게 머리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1366 01:06:58,000 --> 01:07:00,041 하체 근육의 힘이었다 1367 01:07:00,125 --> 01:07:02,666 언뜻 입을 크게 벌리는 게 보였고 1368 01:07:02,750 --> 01:07:03,791 누런 앞니가 드러나며 1369 01:07:03,875 --> 01:07:06,541 입을 벌리느라 얼굴이 일그러졌다 1370 01:07:07,875 --> 01:07:09,791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1371 01:07:09,875 --> 01:07:12,208 그래서 눈을 감았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땐 1372 01:07:12,291 --> 01:07:13,333 쥐는 죽어 있었다 1373 01:07:13,416 --> 01:07:15,958 쥐잡이 사내는 돈을 주머니에 넣더니 1374 01:07:16,041 --> 01:07:17,666 입안의 불순물을 뱉었다 1375 01:07:19,666 --> 01:07:21,791 달큰한 맛의 비결이 이겁니다 1376 01:07:21,875 --> 01:07:25,791 큰 공장이나 초콜릿 회사에선 쥐 피로 달큰한 맛을 만들죠 1377 01:07:25,875 --> 01:07:28,000 쥐 피 좀 먹는다고 안 죽어요 1378 01:07:30,708 --> 01:07:32,458 정말 역겹군요 1379 01:07:32,541 --> 01:07:35,000 사실입니다 두 분도 많이 먹었을 거예요 1380 01:07:35,083 --> 01:07:38,166 막대 초콜릿, 신발 끈 모양 사탕 전부 쥐 피로 만들어요 1381 01:07:38,250 --> 01:07:40,375 그런 얘긴 그만 듣고 싶군요 1382 01:07:40,458 --> 01:07:43,208 커다란 가마솥에 넣고 부글부글 끓이면서 1383 01:07:43,291 --> 01:07:45,333 기다란 막대로 저어대죠 1384 01:07:45,416 --> 01:07:47,875 초콜릿 공장의 중대한 비밀이라 1385 01:07:47,958 --> 01:07:51,791 피를 공급하는 쥐잡이 외엔 아는 사람이 없어요 1386 01:07:51,875 --> 01:07:54,291 사내는 청중이 자기편이 아님을 깨달았다 1387 01:07:54,375 --> 01:07:57,500 역겨움 가득한 우리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게져 있었다 1388 01:07:58,583 --> 01:08:01,375 사내는 말을 멈추고 돌아섰다 1389 01:08:01,458 --> 01:08:06,041 우리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조용히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1390 01:08:06,125 --> 01:08:09,000 자갈을 밟는데도 발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1391 01:08:22,291 --> 01:08:23,125 이상하죠? 1392 01:08:24,000 --> 01:08:25,958 쥐들이 약에 적신 귀리를 안 먹었다니 1393 01:08:27,291 --> 01:08:31,208 건초더미 안에 뭔가 영양가 높은 게 있나 보네요 1394 01:08:47,666 --> 01:08:50,750 "40대 후반, 로알드 달은 아머샴 위스테리아 코티지에서" 1395 01:08:50,833 --> 01:08:53,333 "그 지역과 주민들을 보며 구상한 단막 소설" 1396 01:08:53,416 --> 01:08:56,708 "'클로드의 개'를 집필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1397 01:08:56,791 --> 01:08:58,583 "'쥐잡이 사내'는 그중 한 편이다" 1398 01:09:03,166 --> 01:09:08,083 "독" 1399 01:09:15,958 --> 01:09:17,666 자정쯤 집에 도착했다 1400 01:09:18,625 --> 01:09:21,500 방갈로로 향하면서 헤드라이트를 껐다 1401 01:09:21,583 --> 01:09:24,625 불빛이 창문으로 새어 들어가 해리 포프를 깨울까 봐 그랬는데 1402 01:09:24,708 --> 01:09:26,500 괜한 짓이었다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1403 01:09:27,166 --> 01:09:29,208 주차하고 현관으로 향했는데 1404 01:09:29,291 --> 01:09:32,708 계단이 남은 줄 알고 헛디딜까 봐 세어 가며 올라갔다 1405 01:09:32,791 --> 01:09:34,416 하나, 둘, 셋, 넷 1406 01:09:39,333 --> 01:09:42,208 해리의 방으로 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여다봤다 1407 01:09:42,291 --> 01:09:45,458 눈을 뜬 채 침대에 누워 미동도 없이 고개도 안 돌렸지만 1408 01:09:45,583 --> 01:09:47,791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고 알아듣기 힘들었다 1409 01:09:47,875 --> 01:09:48,750 도와줘 1410 01:09:48,833 --> 01:09:49,666 '도와줘'? 1411 01:09:52,625 --> 01:09:54,875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1412 01:09:54,958 --> 01:09:55,791 멈춰 1413 01:09:55,875 --> 01:09:56,750 '멈춰'? 1414 01:09:56,833 --> 01:10:00,125 쥐어짜는 듯한 소리라 뭐라는지 잘 안 들렸다 1415 01:10:00,708 --> 01:10:02,458 - 도와줘 - '도와줘'? 1416 01:10:02,541 --> 01:10:03,958 왜 그래, 해리? 1417 01:10:04,041 --> 01:10:06,041 신발 벗어 1418 01:10:06,916 --> 01:10:08,500 '신발 벗어'? 1419 01:10:09,041 --> 01:10:11,833 배에 총 맞은 후의 조지 발링 목소리 같았다 1420 01:10:11,916 --> 01:10:13,583 당시 그는 상자에 기대서서 1421 01:10:13,666 --> 01:10:16,375 배를 부여잡고 일본군 조종사를 욕했는데 1422 01:10:16,458 --> 01:10:19,458 지금의 해리처럼 쥐어짜며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1423 01:10:19,541 --> 01:10:21,791 물론 조지 발링은 그 후에 고꾸라져서 1424 01:10:21,875 --> 01:10:22,708 죽었다 1425 01:10:23,500 --> 01:10:24,500 신발 벗어 1426 01:10:25,208 --> 01:10:26,291 '신발 벗어' 1427 01:10:28,375 --> 01:10:30,958 영문은 모르겠지만 들어주기로 했다 1428 01:10:37,875 --> 01:10:39,500 - 왜 그래, 해리? - 건드리지 마 1429 01:10:41,916 --> 01:10:45,291 해리는 몸의 3/4쯤을 홑이불로 덮고 반듯이 누워서 1430 01:10:45,375 --> 01:10:47,666 줄무늬 잠옷 차림에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1431 01:10:47,750 --> 01:10:49,916 더워서 나도 땀이 났지만 해리는 너무 심했다 1432 01:10:50,000 --> 01:10:51,916 얼굴이 번들거리고 베개는 푹 젖어 있었다 1433 01:10:52,500 --> 01:10:53,833 말라리아인 듯싶었다 1434 01:10:53,916 --> 01:10:55,250 - 왜 그래, 해리? - 우산뱀 1435 01:10:55,333 --> 01:10:56,208 - 뭐? - 우산뱀 1436 01:10:56,291 --> 01:10:57,625 - '우산'? - 뱀 말이야 1437 01:10:58,833 --> 01:11:00,583 우산뱀한테 물렸어? 어딜? 언제? 1438 01:11:00,666 --> 01:11:01,500 아니야 1439 01:11:01,583 --> 01:11:02,416 뭐? 1440 01:11:06,041 --> 01:11:07,250 아직 안 물렸어 1441 01:11:09,291 --> 01:11:11,541 이해가 안 돼서 맹한 표정으로 해리를 보았다 1442 01:11:13,416 --> 01:11:16,250 우산뱀이 내 배에서 자고 있어 1443 01:11:18,833 --> 01:11:20,833 뒤로 펄쩍 물러났다 어쩔 수가 없었다 1444 01:11:20,916 --> 01:11:23,583 이불이 덮인 배 부분을 뚫어져라 봤지만 1445 01:11:23,666 --> 01:11:25,875 안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1446 01:11:26,916 --> 01:11:29,833 설마 지금 우산뱀이 자네 배 위에서 자고 있다고? 1447 01:11:29,916 --> 01:11:30,750 그래 1448 01:11:38,291 --> 01:11:39,333 어떻게 들어갔지? 1449 01:11:39,916 --> 01:11:43,208 괜한 질문이었다 그냥 조용히 있으라고 할걸 1450 01:11:44,625 --> 01:11:50,958 누워서 책을 읽는데 책 뒤쪽 가슴에 뭔가 느껴졌어 1451 01:11:51,041 --> 01:11:51,958 간지러웠지 1452 01:11:54,291 --> 01:11:59,750 그리고 작은 우산뱀이 잠옷 위로 올라오는 게 보였어 1453 01:12:00,583 --> 01:12:02,958 작아, 25cm쯤 되려나 1454 01:12:04,250 --> 01:12:08,541 움직이면 안 되니 그대로 얼어붙어 지켜봤지 1455 01:12:08,625 --> 01:12:12,166 이불 위로 움직일 줄 알았는데 1456 01:12:12,250 --> 01:12:13,750 해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 1457 01:12:13,833 --> 01:12:17,541 속닥대는 소리에 자고 있는 놈이 깨진 않을까, 관찰했다 1458 01:12:18,958 --> 01:12:20,458 속으로 들어가더라 1459 01:12:21,958 --> 01:12:26,000 배 부분에서 움직이는 게 잠옷 위로 느껴졌어 1460 01:12:27,125 --> 01:12:31,333 그러다 멈추더니 자는 거야 1461 01:12:35,208 --> 01:12:36,375 그래서 기다렸어 1462 01:12:37,291 --> 01:12:38,625 - 얼마나? - 몇 시간쯤 1463 01:12:39,750 --> 01:12:42,583 몇 시간이고 몇 시간이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1464 01:12:42,666 --> 01:12:45,458 더는 못 버티겠어 기침 나올 것 같아 1465 01:12:48,875 --> 01:12:52,375 사실 우산뱀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1466 01:12:52,458 --> 01:12:56,041 우산뱀은 민가 근처에서 따뜻한 곳을 찾곤 하니까 1467 01:12:56,125 --> 01:12:59,208 진짜 놀라운 건 아직 안 물렸다는 사실이었다 1468 01:12:59,291 --> 01:13:02,250 물릴 경우 당장 뱀을 잡고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1469 01:13:02,333 --> 01:13:04,625 죽을 수 있을 만큼 치명적인 녀석이었다 1470 01:13:05,458 --> 01:13:07,541 작고 가는 우산뱀은 바로 이렇게 생겼다 1471 01:13:09,833 --> 01:13:11,791 아주 작은 틈이라도 있으면 1472 01:13:11,875 --> 01:13:15,583 어린아이의 침실 문 틈으로 아무도 모르게 들어갈 수 있다 1473 01:13:17,166 --> 01:13:21,375 어떤 차 농장 관리인이 뒷다리 물린 양 얘길 해줬었는데 1474 01:13:21,458 --> 01:13:25,750 사체의 몸을 갈라보니 피가 새까만 타르 같았단다 1475 01:13:29,916 --> 01:13:33,208 '그래, 해리' 내가 말했다 나도 속삭였다 1476 01:13:33,291 --> 01:13:35,625 '움직이지 말고 필요 없는 말도 하지 마' 1477 01:13:35,708 --> 01:13:38,333 '놀라게만 안 하면 안 물 거야 해결해 볼게' 1478 01:13:41,000 --> 01:13:44,750 나는 양말 바람으로 주방에 가서 작고 잘 드는 칼을 꺼냈다 1479 01:13:45,291 --> 01:13:49,500 혹시 우산뱀이 놀라 해리를 물면 곧장 쓸 수 있게 주머니에 넣었다 1480 01:13:49,583 --> 01:13:51,583 물린 곳을 째고 독을 빨아낼 작정이었다 1481 01:13:52,958 --> 01:13:54,750 '해리' 내가 말했다 1482 01:13:54,833 --> 01:13:58,750 '우선은 내가 이불을 살짝 걷고 안을 보는 게 최선일 것 같아' 1483 01:13:59,375 --> 01:14:01,375 멍청한 놈 1484 01:14:02,833 --> 01:14:06,708 목소리엔 감정이 없었다 너무 느리고 조용했으니까 1485 01:14:06,791 --> 01:14:10,125 대신 눈동자와 입꼬리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1486 01:14:10,750 --> 01:14:14,583 빛 때문에 놀라서 날 죽일 거라고 1487 01:14:16,583 --> 01:14:17,458 좋은 지적이네 1488 01:14:18,208 --> 01:14:20,458 이불을 확 들추고 휙 치워버릴까? 1489 01:14:20,541 --> 01:14:22,583 의사 불러 1490 01:14:24,375 --> 01:14:27,333 왜 너는 그런 생각을 못 하냐는 표정이었다 1491 01:14:27,416 --> 01:14:30,125 의사, 맞네, 그거야 간더바이 선생을 부를게 1492 01:14:30,208 --> 01:14:32,666 까치발을 들고 나가 간더바이의 번호를 찾은 다음 1493 01:14:32,750 --> 01:14:34,708 수화기를 들고 교환원을 재촉했다 1494 01:14:40,083 --> 01:14:41,541 선생님, 우즈 감독관입니다 1495 01:14:41,625 --> 01:14:43,458 안녕하십니까 아직 안 주무셨네요 1496 01:14:43,541 --> 01:14:45,666 지금 당장 우산뱀 해독제 갖고 와주세요 1497 01:14:45,750 --> 01:14:47,375 우산뱀 해독제를? 누가 물린 겁니까? 1498 01:14:47,458 --> 01:14:50,000 날카로운 외침에 귓속에서 폭탄이 터진 듯했다 1499 01:14:50,083 --> 01:14:51,208 아직 안 물렸고 1500 01:14:51,291 --> 01:14:54,166 지금 해리 이불 속 배 위에 한 마리가 자고 있어요 1501 01:14:54,250 --> 01:14:56,291 3초 정도 침묵이 흘렀다 1502 01:14:58,291 --> 01:15:02,000 이번엔 천천히 부드럽게 정확하게 간더바이가 말했다 1503 01:15:02,083 --> 01:15:04,958 움직이거나 말하면 안 돼요 알겠습니까? 1504 01:15:05,041 --> 01:15:06,958 - 그럼요 - 지금 가지요 1505 01:15:07,041 --> 01:15:08,583 전화를 끊고 다시 침실로 갔다 1506 01:15:11,500 --> 01:15:13,208 당장 옆으로 오라는 눈빛이었다 1507 01:15:13,291 --> 01:15:15,166 간더바이 선생이 온대 가만히 있으래 1508 01:15:15,750 --> 01:15:17,541 지금까진 뭘 했을 것 같대? 1509 01:15:17,625 --> 01:15:19,125 말도 하지 말래, 우리 둘 다 1510 01:15:19,208 --> 01:15:20,333 그럼 닥쳐 1511 01:15:21,333 --> 01:15:24,583 그 말을 하는데 입 한쪽 옆의 웃을 때 쓰는 근육이 1512 01:15:24,666 --> 01:15:28,750 바르르 떨리며 아래로 내려갔고 말을 끝낸 후에도 꽤 지속됐다 1513 01:15:29,333 --> 01:15:31,541 맘에 안 들었다 말투도 마음에 안 들었고 1514 01:15:33,083 --> 01:15:35,166 의사의 차가 급히 들어왔다 1515 01:15:37,166 --> 01:15:38,333 마중 나갔다 1516 01:15:41,583 --> 01:15:42,625 어디 있습니까? 1517 01:15:42,708 --> 01:15:46,125 의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날 지나 복도로 들어가 1518 01:15:46,208 --> 01:15:47,708 의자에 가방을 놓았다 1519 01:15:47,791 --> 01:15:49,791 바닥이 푹신한 침실용 슬리퍼를 신은 채 1520 01:15:49,875 --> 01:15:52,791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조용히 방을 가로질렀다 1521 01:15:52,875 --> 01:15:54,875 해리는 곁눈으로 선생을 보았고 1522 01:15:54,958 --> 01:15:57,625 선생은 침대 옆으로 가 미소 지으며 해리를 내려다봤다 1523 01:15:57,708 --> 01:15:59,833 안심시키는 얼굴로 끄덕이는데 이런 말을 하는 듯했다 1524 01:15:59,916 --> 01:16:03,083 간단한 일이니 걱정 마시고 이 간더바이한테 맡기세요 1525 01:16:03,166 --> 01:16:05,375 그러곤 주방으로 갔고 나도 따라갔다 1526 01:16:07,125 --> 01:16:08,125 가방을 열었다 1527 01:16:08,208 --> 01:16:12,166 일단 해독제를 주사해야 하는데 움직이지 않게 조심해야 돼요 1528 01:16:12,250 --> 01:16:14,500 한 손엔 주사기를 한 손엔 작은 병을 들고는 1529 01:16:14,583 --> 01:16:17,333 병에 바늘을 꽂고 연노랑색 액체를 뽑아서 1530 01:16:17,416 --> 01:16:19,875 - 내게 건넸다 - 갖고 있다가 말하면 주세요 1531 01:16:19,958 --> 01:16:21,166 선생은 방으로 돌아갔다 1532 01:16:26,291 --> 01:16:28,416 크게 뜬 해리의 눈동자가 빛났다 1533 01:16:28,500 --> 01:16:30,916 선생은 조심스럽게 해리의 잠옷 소매를 걷어 1534 01:16:31,000 --> 01:16:32,833 팔을 움직이지 않고 팔꿈치까지 올렸다 1535 01:16:32,916 --> 01:16:35,208 침대에서 살짝 떨어진 채 속삭이기를… 1536 01:16:35,291 --> 01:16:38,416 주사를 놓을 겁니다 좀 따끔하겠지만 움직이지 말고 1537 01:16:38,500 --> 01:16:41,166 배에 힘도 주지 마시고 몸에 힘 빼고 계세요 1538 01:16:41,250 --> 01:16:44,125 주사기를 본 해리의 웃음 근육이 또 씰룩거렸다 1539 01:16:45,708 --> 01:16:49,291 선생은 고무관으로 해리의 위쪽 팔뚝을 묶고 1540 01:16:49,375 --> 01:16:51,958 아래쪽 팔뚝의 한 부분을 알코올 솜으로 닦았다 1541 01:16:52,041 --> 01:16:53,583 그리고 주사기를 들어 1542 01:16:53,666 --> 01:16:56,291 실눈으로 눈금을 보면서 노란 액체를 조금 뿜어냈다 1543 01:16:56,375 --> 01:16:58,250 땀 범벅인 해리의 얼굴은 1544 01:16:58,333 --> 01:17:01,833 크림을 듬뿍 바른 듯 번들거렸고 땀이 베개로 흘러내렸다 1545 01:17:01,916 --> 01:17:05,458 지혈대 아래쪽 팔뚝에 부풀어 오른 파란 정맥이 보였다 1546 01:17:05,541 --> 01:17:08,833 간더바이는 주삿바늘을 팔뚝에 납작하게 대더니 1547 01:17:08,916 --> 01:17:11,250 피부를 포 뜨듯 찔러 정맥에 집어넣었다 1548 01:17:11,333 --> 01:17:14,166 흔들림 없이 천천히 치즈에 찌르듯 부드럽게 1549 01:17:14,250 --> 01:17:17,208 해리는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일 뿐 움직이진 않았다 1550 01:17:17,291 --> 01:17:19,583 간더바이는 몸을 숙여 해리의 귀에 입을 갖다 댔다 1551 01:17:19,666 --> 01:17:23,791 이젠 혹시 물려도 괜찮겠지만 움직이지 마세요, 곧 오죠 1552 01:17:24,500 --> 01:17:27,541 - '이제 안전한가요?' 내가 물었다 - 아뇨, 반반입니다 1553 01:17:27,625 --> 01:17:30,416 선생은 이마를 닦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1554 01:17:30,500 --> 01:17:33,458 방도가 있을 거다 1555 01:17:33,541 --> 01:17:36,125 조용히 되뇌며 머리를 짜냈다 1556 01:17:38,208 --> 01:17:41,666 마취제를 사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1557 01:17:42,375 --> 01:17:45,000 그 짐승이 있는 곳에요 1558 01:17:46,875 --> 01:17:48,333 훌륭한 제안이었다 1559 01:17:48,416 --> 01:17:49,375 좀 위험할 겁니다 1560 01:17:49,458 --> 01:17:53,125 뱀 같은 냉혈 동물은 마취 속도가 느리거든요 1561 01:17:53,208 --> 01:17:55,083 근데 다른 방법이 없어요 1562 01:17:55,166 --> 01:17:57,125 - 에테르, 클로로폼? - 난 끄덕였다 1563 01:17:57,208 --> 01:17:59,583 - 어떤 걸로 하지? - 내게 묻는 건가? 모르겠다 1564 01:17:59,666 --> 01:18:00,500 클로로폼! 1565 01:18:01,083 --> 01:18:02,875 선생은 내 팔을 잡아끌고 현관으로 갔다 1566 01:18:04,458 --> 01:18:07,291 내 집으로 가세요 아이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1567 01:18:07,375 --> 01:18:09,291 이건 독성 약품 선반 열쇠예요 1568 01:18:09,375 --> 01:18:12,750 클로로폼 병엔 오렌지색 라벨에 이름이 적혀 있을 겁니다 1569 01:18:12,833 --> 01:18:15,291 난 혹시 모르니 여기 있죠 빨리 가요! 1570 01:18:15,916 --> 01:18:17,541 - 신발을… - 안 신어도 돼요 1571 01:18:20,250 --> 01:18:23,166 나는 빠르게 차를 몰아 15분 만에 약을 가져왔다 1572 01:18:26,250 --> 01:18:29,916 계획을 말해주긴 했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잔뜩 겁먹어서 1573 01:18:30,000 --> 01:18:32,083 언제까지 버틸지 모르겠습니다 1574 01:18:35,791 --> 01:18:38,666 해리는 아까 그 자세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1575 01:18:38,750 --> 01:18:42,041 땀 범벅이 된 새하얀 얼굴로 눈을 굴려 날 보았다 1576 01:18:42,125 --> 01:18:43,833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577 01:18:43,916 --> 01:18:46,666 선생은 지혈대로 썼던 고무관을 집어 들고 1578 01:18:46,750 --> 01:18:48,958 한쪽 끝에 종이 깔때기를 끼웠다 1579 01:18:49,041 --> 01:18:52,666 그리고 이불 한쪽을 살짝 들어 고무관을 넣고는 1580 01:18:52,750 --> 01:18:55,333 해리의 몸쪽으로 밀어 넣었다 1581 01:18:56,125 --> 01:18:58,541 몇 cm 집어넣는 데에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 1582 01:18:58,625 --> 01:19:00,375 20분, 혹은 40분 1583 01:19:00,458 --> 01:19:03,875 고무관은 안 움직이는 듯했지만 보이는 부분이 점점 줄긴 했다 1584 01:19:04,375 --> 01:19:06,333 선생도 땀을 흘리기 시작했고 1585 01:19:06,416 --> 01:19:08,875 이마와 인중에 땀방울이 맺혔지만 1586 01:19:08,958 --> 01:19:10,291 손은 전혀 떨림이 없었고 1587 01:19:10,375 --> 01:19:13,291 눈은 해리의 배를 덮은 이불에 고정돼 있었다 1588 01:19:13,375 --> 01:19:15,375 그대로 클로로폼을 달라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1589 01:19:15,458 --> 01:19:17,125 나는 뚜껑을 비틀어 연 다음 1590 01:19:17,208 --> 01:19:20,500 선생이 병을 제대로 쥐는 걸 확인한 후에야 병을 놓았다 1591 01:19:21,666 --> 01:19:25,958 포프 씨, 매트리스가 젖으면 몸이 차가워질 겁니다 1592 01:19:26,041 --> 01:19:27,375 마음 단단히 먹고 가만히… 1593 01:19:27,458 --> 01:19:28,666 빨리해요! 1594 01:19:29,291 --> 01:19:31,000 해리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1595 01:19:31,083 --> 01:19:34,208 선생은 해리를 잠시 노려보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1596 01:19:34,291 --> 01:19:37,541 깔때기에 액체를 조금 붓고 관을 따라 내려가길 기다렸다 1597 01:19:37,625 --> 01:19:38,916 좀 더 붓고 또 기다렸다 1598 01:19:47,541 --> 01:19:50,666 역겹고 강렬한 클로로폼 냄새가 온 방에 퍼지면서 1599 01:19:50,750 --> 01:19:52,500 희미하고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다 1600 01:19:52,583 --> 01:19:55,708 하얀 수술대가 있는 하얀 방 간호사들과 의사들 1601 01:19:55,791 --> 01:19:57,375 선생은 계속 액체를 따랐고 1602 01:19:57,458 --> 01:20:01,041 그 끔찍한 액체의 짙은 증기가 종이 깔때기에서 피어올랐다 1603 01:20:02,083 --> 01:20:05,166 선생은 잠시 멈췄다 더 따르더니 내게 병을 건네고는 1604 01:20:05,250 --> 01:20:07,583 고무관을 천천히 빼내고 일어났다 1605 01:20:07,666 --> 01:20:10,250 작업의 긴장도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1606 01:20:10,333 --> 01:20:12,583 날 돌아보며 말하는데 목소리가 이러했다 1607 01:20:12,666 --> 01:20:14,791 혹시 모르니 15분 기다립시다 1608 01:20:14,875 --> 01:20:16,291 난 해리에게 전달하려 했다 1609 01:20:16,375 --> 01:20:17,291 혹시 모르니 15분… 1610 01:20:17,375 --> 01:20:18,291 들었어! 1611 01:20:18,375 --> 01:20:21,666 이번엔 선생도 깜짝 놀랐고 작은 얼굴에 분노가 차올랐다 1612 01:20:21,750 --> 01:20:25,125 그가 매섭게 노려보자 해리의 웃음 근육이 또 씰룩댔다 1613 01:20:25,208 --> 01:20:26,958 침대 옆에서 기다리는 15분 내내 1614 01:20:27,041 --> 01:20:29,916 선생은 호기심 가득하고 사람을 휘어잡는 강렬한 눈빛으로 1615 01:20:30,000 --> 01:20:31,541 해리를 응시했으며 1616 01:20:31,625 --> 01:20:33,250 해리를 꼼짝 못 하게 하고 1617 01:20:33,333 --> 01:20:35,875 조용히 있게 하는 데에 온 힘을 집중했다 1618 01:20:35,958 --> 01:20:38,583 눈을 절대 떼지 않았으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1619 01:20:38,666 --> 01:20:41,125 이렇게 외치는 듯 보였다 1620 01:20:41,208 --> 01:20:43,000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마 1621 01:20:43,083 --> 01:20:45,375 일을 그르치면 절대 안 돼 알아들었나? 1622 01:20:46,416 --> 01:20:48,583 침묵 속에 입술을 씰룩이는 해리 1623 01:20:48,666 --> 01:20:50,750 땀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1624 01:20:50,833 --> 01:20:52,875 날 봤다가, 이불을 봤다가 천장을 봤지만 1625 01:20:52,958 --> 01:20:54,541 선생 쪽은 보지 않았다 1626 01:20:54,625 --> 01:20:56,750 그래도 간더바이 선생은 일에 집중했다 1627 01:20:58,375 --> 01:21:00,416 옆에서 누가 거대한 풍선을 부는데 1628 01:21:00,500 --> 01:21:03,125 곧 터질 것 같지만 외면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1629 01:21:03,208 --> 01:21:06,166 마침내 선생이 끄덕였다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였다 1630 01:21:06,833 --> 01:21:08,041 침대 반대쪽으로 가세요 1631 01:21:08,125 --> 01:21:10,791 시트 양쪽을 잡고 함께 벗겨낼 겁니다 1632 01:21:10,875 --> 01:21:13,000 아주 천천히 하세요 포프 씨는 가만히 계시고요 1633 01:21:24,250 --> 01:21:26,541 해리의 가슴 부분이 완전히 드러났다 1634 01:21:26,625 --> 01:21:30,083 잠옷 바지 끈이 나비 모양으로 얌전히 묶여 있는 게 보였다 1635 01:21:30,166 --> 01:21:32,875 조금 더 아래쪽엔 자개단추가 달려 있었는데 1636 01:21:32,958 --> 01:21:34,791 잠옷 바지 앞섶에 단추라니 1637 01:21:34,875 --> 01:21:37,000 난 자개는커녕 단추 달린 건 입어본 적도 없다 1638 01:21:37,583 --> 01:21:39,958 이런 순간에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라니 1639 01:21:40,500 --> 01:21:42,125 배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1640 01:21:45,041 --> 01:21:46,208 가만히 계세요, 포프 씨 1641 01:21:46,291 --> 01:21:49,250 선생은 해리의 몸통과 다리 아래를 유심히 살폈다 1642 01:21:49,333 --> 01:21:52,125 조심하세요 바지 속으로 들어갔을지 몰라요 1643 01:21:52,208 --> 01:21:53,041 해리가 일어났다 1644 01:21:55,250 --> 01:21:56,625 처음으로 움직였다 1645 01:21:58,083 --> 01:22:00,916 벌떡 일어나 서더니 양쪽 다리를 격하게 흔들었다 1646 01:22:01,000 --> 01:22:04,250 우린 물린 줄 알았고 선생은 메스와 지혈대를 찾았다 1647 01:22:04,333 --> 01:22:07,958 그런데 해리가 멈춰 서더니 침대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1648 01:22:08,041 --> 01:22:08,916 없어! 1649 01:22:09,000 --> 01:22:10,958 선생이 고개를 들고 해리를 쳐다봤다 1650 01:22:11,666 --> 01:22:12,791 해리는 무사했다 1651 01:22:12,875 --> 01:22:15,916 물리지도 않았고 물려 죽을 일도 없었다 1652 01:22:16,000 --> 01:22:17,125 이제 모두 해결됐다 1653 01:22:17,708 --> 01:22:18,583 그런 듯했다 1654 01:22:19,625 --> 01:22:21,333 꿈을 꾸셨나 봅니다, 포프 씨 1655 01:22:30,416 --> 01:22:34,125 비아냥거릴 의도가 없었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1656 01:22:34,208 --> 01:22:36,291 극도의 긴장감이 풀려 헛웃음이 나온 것이다 1657 01:22:36,375 --> 01:22:39,083 해리 생각은 달랐다 줄무늬 잠옷 바람으로 서서 1658 01:22:39,166 --> 01:22:41,958 선생을 노려보는 그의 뺨이 점점 시뻘게졌다 1659 01:22:42,041 --> 01:22:44,291 내가 거짓말쟁이라는 건가? 1660 01:22:47,083 --> 01:22:49,500 선생은 꼼짝 않고 해리를 바라보았다 1661 01:22:49,583 --> 01:22:52,791 해리가 눈을 번뜩이며 침대 위에서 한 발 다가섰다 1662 01:22:53,958 --> 01:22:56,333 더러운 벵골 시궁쥐 같은 게 1663 01:22:56,416 --> 01:22:57,458 '닥쳐, 해리' 내가 말했다 1664 01:22:57,541 --> 01:22:59,791 - 이 더럽고 시커멓고 하찮은… - 닥치라니까! 1665 01:22:59,875 --> 01:23:01,333 - 천민 주제에 - 닥쳐! 1666 01:23:01,416 --> 01:23:02,291 그만! 1667 01:23:05,708 --> 01:23:08,458 선생은 방에서 나갔고 나도 따라나섰다 1668 01:23:08,541 --> 01:23:10,666 내가 말했다, '정신이 나가서 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 1669 01:23:10,750 --> 01:23:14,041 우린 암흑 속에 진입로를 지나 선생의 낡은 모리스 자동차로 갔다 1670 01:23:14,125 --> 01:23:14,958 "대영제국 황마 농장" 1671 01:23:15,041 --> 01:23:15,875 선생이 차에 탔다 1672 01:23:15,958 --> 01:23:18,666 '정말 훌륭하셨어요' 내가 말했다 '그 친구를 살리셨습니다' 1673 01:23:18,750 --> 01:23:20,833 - 그건 아니죠 - 그래도 어쩌면… 1674 01:23:20,916 --> 01:23:24,250 어쨌든 은인이세요 해리 생명의 은인이라고요 1675 01:23:24,333 --> 01:23:25,625 아닙니다 1676 01:23:28,208 --> 01:23:29,125 미안합니다 1677 01:23:30,583 --> 01:23:31,416 그럴 리가요 1678 01:23:38,916 --> 01:23:41,416 간더바이 선생은 시동을 걸고 가버렸다 1679 01:23:54,500 --> 01:23:57,791 "달은 1950년 1월에 '독'을 쓰기 시작했다" 1680 01:23:57,875 --> 01:23:59,583 "'우즈'라는 이름은" 1681 01:23:59,666 --> 01:24:01,500 "애선스 전투에서 전사한" 1682 01:24:01,583 --> 01:24:05,125 "제80 비행대대 동료 파일럿의 이름에서 따왔다" 1683 01:24:24,750 --> 01:24:28,666 소설가 지망생이 가져야 할 혹은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할 1684 01:24:28,750 --> 01:24:31,041 능력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1685 01:24:32,375 --> 01:24:34,750 생생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1686 01:24:36,166 --> 01:24:38,125 글을 잘 써야 하지요 1687 01:24:38,208 --> 01:24:39,166 다시 말해 1688 01:24:39,250 --> 01:24:43,375 독자의 머릿속에 생생한 장면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1689 01:24:43,458 --> 01:24:47,125 누구나 가진 능력은 아니고 타고나는 재능이라 1690 01:24:47,208 --> 01:24:49,208 가진 사람도, 못 가진 사람도 있죠 1691 01:24:50,041 --> 01:24:52,750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1692 01:24:52,833 --> 01:24:56,500 하고자 하는 일에 몰두하며 포기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죠 1693 01:24:57,458 --> 01:24:59,041 몇 시간이고 1694 01:25:00,625 --> 01:25:02,166 며칠이고 1695 01:25:04,166 --> 01:25:05,375 몆 주고 1696 01:25:07,291 --> 01:25:09,083 몇 달이고 1697 01:25:10,333 --> 01:25:14,166 몇 년이고 버텨야 합니다 1698 01:25:15,416 --> 01:25:17,833 완벽주의자여야 합니다 1699 01:25:17,916 --> 01:25:21,500 자신이 쓴 글에 절대 만족하지 말고 1700 01:25:21,583 --> 01:25:26,583 다시 쓰고, 또 다시 써서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죠 1701 01:25:27,458 --> 01:25:29,500 자신에게 엄격해야 합니다 1702 01:25:29,583 --> 01:25:32,791 혼자 일하며 누구에게도 고용되지 않으니 1703 01:25:33,791 --> 01:25:37,666 출근 안 한다고 채찍질할 사람도 없고 1704 01:25:37,750 --> 01:25:40,166 요령 피운다고 나무랄 사람도 없으니까요 1705 01:25:41,000 --> 01:25:44,041 유머 감각이 뛰어나면 큰 도움이 됩니다 1706 01:25:44,125 --> 01:25:46,875 독자층이 성인이라면 꼭 필요한 덕목이고 1707 01:25:46,958 --> 01:25:49,083 어린이라면 없어선 안 되죠 1708 01:25:50,333 --> 01:25:51,458 마지막으로 1709 01:25:54,000 --> 01:25:56,000 적당한 겸손은 필수입니다 1710 01:25:58,208 --> 01:26:00,375 본인 작품이 훌륭하다고 자부하는 작가는 1711 01:26:01,791 --> 01:26:03,125 고난을 면치 못하죠 1712 01:26:15,041 --> 01:26:20,041 자막: 여리나